[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스페인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고향 피게레스(Figueres)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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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6-08   |  발행일 2018-06-08 제37면   |  수정 2018-06-15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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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극장 박물관 내부에서 바라본 중앙 정원. 뒤집어진 배가 걸려 있고, 창마다 마네킹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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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극장 박물관 거리. 오른쪽 탑이 달리가 살았던 집이며, 정면의 돔 지붕 건물이 달리 극장 박물관이다. 중앙 홀의 ‘달리 시각의 링컨’.‘매이 웨스트 방’의 ‘아파트로 쓰일 수 있는 매이 웨스트의 얼굴’. (위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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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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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의 부인이자 뮤즈였던 갈라의 초상화.

프랑스 보르도에서 프로방스로 접어들면서 굳이 콜리우르를 들른 이유는 에르미타쉬 박물관에서 보았던 마티스의 ‘춤’에 대한 인상이 워낙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푸른색과 녹색 바탕에 삐뚤삐뚤 춤추는 붉은 나신은 문외한인 내가 봐도 인상적이었다. 그러니 20세기 초 문화 환경에서 그를 야수파(Fauvism)로 부른 것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야수파들의 고향으로 불리는 곳이 콜리우르다. 그들의 예술을 키운 콜리우르는 어떤 곳일까 궁금했다. 그런데 이 여정은 또 예정에도 없던 스페인으로 나를 끌었다.

달리가 직접 디자인한 극장 박물관
그의 작품 3분의1…1400여점 채워져
공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예술작품
링컨·매이 웨스트 방·바람의 궁전…
우리가 믿는게 사실 다른 것일수도

유부녀이자 열살 연상의 갈라와 사랑
비난 불구, 뮤즈로서 예술의 길 동행



콜리우르 마을과 바닷가에서 마티스를 비롯해 드랭, 후안 그리, 조지 브라크 등 야수파 화가들의 자취를 더듬다보니 의외로 피카소와 달리의 흔적도 자주 보였다. 특히 이곳 바닷가는 달리의 ‘기억의 지속’을 계속 떠올리게 했다. 나뭇가지에 걸려 녹아내리는 듯한 시계의 배경과 자꾸 오버랩되었다. 불현듯 그의 고향 피게레스를 가보고 싶었다. 국경을 넘어야 하지만 유럽에서 국경이란 그냥 지도에 그어져 있는 선에 불과한 것. 구글맵을 켜보니 피게레스까지 고작 60㎞였다.

피게레스는 프랑스와 인접한 스페인 카탈루냐 히로나(Girona) 주에 있는 작은 도시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의 고향이 아니라면, 또 그가 직접 디자인한 살바도르 달리 극장 박물관(Teatre-Museu Gala Salvador Dali)이 없다면 방문할 이유가 없는 곳이기도 했다. 시내로 접어들었지만 눈에 띄는 건물 하나 없었다. 달리 극장 박물관에 맞춰진 내비게이션은 금방 도착한다는 신호를 연신 보냈다. 얼마 후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건물이 나타났다. 빵 모양의 오브제가 줄지어 달린 붉은 벽과 건물 꼭대기에 달걀 모양의 조형물이 얹혀 있는 건물이었다. 이름에서 짐작하듯이 이곳은 원래 시민 극장이었다. 달리는 말년에 내전으로 방치되어 있던 이 건물을 멋진 미술관으로 개조했다. 건물 자체를 또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으로 만들었고, 거기에 그의 작품 3분의 1에 해당하는 1천400여 점을 채웠다. 그의 나이 71세 때인 1974년의 일이다.

가이드북에서는 맨 위층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면서 작품을 감상할 것을 권한다. 달리는 “이 박물관은 하나의 초현실주의 오브제로서 이 안에서는 모든 것이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나의 동선은 꼬이기 시작했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눈을 사로잡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작품들 때문이었다. 화려한 외부 모습에 걸맞게 내부도 상상을 초월하는 장식과 작품으로 가득했다. 관람이라도 ‘초현실주의’적으로 해보자는 생각으로 이리저리 내키는 대로 기웃거렸다. 건물을 들어서면 마당에 설치된 자동차와 여인, 창마다 세워진 수많은 인물상, 부드러운 곡선의 계단, 천상의 세계를 표현한 천장 등 작품이 아닌 것이 없다. 공간 전체가 예술 작품이다.

입구에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원형 마당 한가운데 있는 캐딜락 ‘The Rainy Taxi’다. 자동차 보닛 위에는 목에 쇠사슬을 찬 풍만한 몸매의 아프리카 여인상이 위풍당당하게 서있다. 동전을 넣으면 캐딜락 안에 비가 내리고, 차안에 있는 사람들은 비를 맞는다. 밖은 멀쩡한데 차안에서 오히려 비를 맞는 것이다. 고개를 들면 작은 우산을 쓰고 있는 배가 뒤집어진 채 공중에 떠있다. 배의 바닥에는 빗방울이 내리듯 파란색 콘돔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하늘을 나는 배가 흘리는 눈물 같았다. 모두 일반적인 상황을 뒤집은 것이다. 달리다웠다.

창문 난간마다 다양한 포즈로 서있는 마네킹들은 그의 부와 영광을 시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조금 위축된 마음으로 복도를 따라 중앙홀로 향했다. 입구 정중앙에 커다란 그림 한 점이 걸려 있었다. 멀리서 올려다보니 링컨의 모습이었다. 습관적으로 카메라를 대고 줌인을 하는 순간 웃음이 번졌다. 그냥 평범한 그림이면 달리가 아니지. 내가 본 링컨은 당겨진 카메라 렌즈 속에서 관능적인 누드화로 바뀌어 있었다. 달리의 부인이자 뮤즈였던 갈라의 뒷모습 누드가 숨겨져 있는 ‘달리 시각의 링컨’이라는 작품이다. 갈라와 링컨은 어떤 상상으로도 겹쳐지는 요소가 떠오르지 않을 만큼 ‘전혀’ 다르다. 이처럼 우리들이 같다고 믿는 것이 사실은 다른 것일 수 있겠다. 신기함에서 시작해 묘한 감동으로 끝나는 작품이었다.

한쪽으로 난 계단을 올라가니 아늑하게 꾸며진 ‘매이 웨스트 방(Mae West Room)’이 나왔다. 매이 웨스트는 1930년대 세계적 섹스 심벌이었던 여배우다. 하얀 벽에 두 점의 흑백 그림이 금빛 액자 안에 걸려 있고, 그 가운데 사람의 코를 응용해 만든 특이한 벽난로가 있었다. 그 앞에 놓인 빨간 입술 모양의 소파도 특이했다. 막연히 독특한 인테리어라는 생각을 하며 계단을 올랐다. 잠시 후 금빛 가발이 달린 렌즈를 통해 바라본 이 응접실은 상상도 못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렌즈 속에 관능미 넘치는 매이 웨스트의 얼굴이 나타난 것이다. 액자는 그녀의 눈이 되고 가운데 벽난로는 코, 소파는 입술이었다. ‘아파트로 쓰일 수 있는 매이 웨스트의 얼굴(Face of Mae West Which May Be Used as an Apartment)’이라는 이 작품은 이 박물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 가운데 하나다. 이처럼 그의 작품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고, 무엇 하나 비틀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의 1923년 작품 ‘풍자적 구성(Satirical Composition)’은 ‘The Dance by Matisse’라는 부제가 없어도 한눈에 나를 여기까지 끌었던 마티스의 ‘춤’을 패러디한 작품임을 알 수 있었다. 마티스의 작품은 나신의 역동적인 춤 동작만 있는데, 이 그림에는 바이올린을 켜는 신사와 나신으로 북을 두드리는 남자가 추가돼 있다. 혹시 바이올린 연주를 잘했던 마티스와 자신을 그려놓은 것은 아닐까 추측해본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기억의 지속’을 태피스트리(tapestry) 버전으로 만들어 걸어놓은 ‘바람의 궁전(Palace of the Wind)’이라는 이름의 전시실도 흥미로웠다. 특히 미켈란 젤로의 ‘천지창조’를 패러디한 천장화가 인상적이다. 먼저 커다란 두 쌍의 발바닥이 시선을 사로잡는데, 푸른 바지에 콧수염을 날리는 달리와 붉은 치마의 갈라가 양쪽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서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쏟아지는 것은 햇살 같이 보이지만 금화이고, 가운데 보이는 하늘 위로는 초승달이 떠있다. 달리가 창조하는 천지는 늘 이렇게 우리의 상상력을 비웃는다.

학창시절 미술 교과서를 통해 알려진 달리는 프로이트의 열렬한 추종자로 무의식의 세계를 작품화한 초현실주의 예술가라는 정도였다. 커다랗게 부릅뜬 눈에 둥그렇게 꼬아 올린 우스꽝스러운 콧수염을 한 그의 사진을 본 것은 어른이 되고도 한참 후였다. 익살맞은 표정에 오만함도 느껴지는 그의 인상은 교과서가 만들어 놓았던 내 상상 속의 이미지와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달랐던 기억이 난다. 마찬가지로 달리를 다르게 바라보며 비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들은 히틀러를 미화하고 원자폭탄을 찬양했다는 사실을 자주 거론한다. 거기에다 열 살 연상의 유부녀 갈라와 바람이 났다는 것도 큰 비난거리였다. 그러나 달리의 이런 작품을 마주하고 보니 우리가 달리의 모든 것을 이해하며 하는 비판인지 의심해봐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정치적인 문제는 그렇다 하더라도 갈라와는 53년을 해로했다. 그리고 이 박물관의 작품들은 갈라의 영향과 흔적들로 가득했다. 갈라는 그 자체로 그의 예술처럼 보였다.

갈라는 원래 파리의 시인 폴 엘뤼아르의 아내였으며, 남편의 친구인 화가 에른스트의 정부였다. 세 사람은 한 집에서 동거하며 5년간이나 묘한 삼각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한편 달리의 젊은 시절을 다룬 영화 ‘리틀 에쉬’를 보면 달리는 스페인의 국민시인으로 유명한 가르시아 로르카와 동성애에 빠져 있었다. 그랬던 스물다섯 살의 젊은 달리가 열 살 연상의 유부녀 갈라에게 첫눈에 반한 것이다. 성적으로 분방했던 갈라는 달리의 끈질긴 구애에 결국 피게레스 근처의 바닷가 마을에서 동거생활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녀는 달리와 함께 수많은 일화들을 만들어내며 그 예술의 길을 동행했다. 돈을 특히 밝혔다고 알려진 달리는 “나는 갈라를 아버지보다도, 어머니보다도, 피카소보다도, 심지어 돈보다도 더 사랑한다”고 말했다. 스스로 성적 불구라고 했던 그가 죽을 때까지 그녀를 놓지 않았던 단 하나의 이유는 그의 뮤즈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 달리는 갈라가 죽은 1982년 이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989년까지 한 점의 작품도 만들지 않았다.

달리의 시신은 이 극장 박물관의 지하 제7전시실에 안치되었다. 지난해 이맘때쯤 뜻하지 않게 그의 시신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달리가 자신의 친아버지라고 주장한 61세의 한 여성 때문이었다. 법원이 그의 DNA 샘플을 채취해 친자확인을 하라고 명했던 것이다. 결국 혈연관계가 없는 것으로 판명났지만 덕분에 관 속에서도 그의 콧수염이 여전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죽어서도 유쾌하게 만든다.
대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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