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걸 교수’의 오래된 미래교육] 피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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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6-11 07:54  |  수정 2018-06-11 07:54  |  발행일 2018-06-11 제17면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위기는 곧 현대 문명의 위기다. 절대 빈곤에 시달리는 노인들과 갈수록 늘어나는 고독사, 그런 노인이 되지 않으려고 퇴직을 한 뒤에도 일자리를 구하려고 노심초사하는 베이비붐 세대들, 용케 직장을 잡아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하는 직장인들, 그리고 아무런 희망도 없는 삼포세대. 이들 모두 현대 문명의 고질병인 고립감·무력감·권태감에 시달리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고질병의 종착지는 우울증이다. 세계보건기구는 2020년까지 우울증이 심장순환질환과 에이즈를 넘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질병 발생 요인이 될 것이라고 했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현대인이 우울증에 빠질 수밖에 없는 까닭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패러다임 전환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규율사회는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주장한 대로 금지의 규율로 정상과 비정상을 갈라놓는 사회다. 금지를 위반하는 사람들은 광인과 범죄자가 되어 정신병원이나 감옥으로 분리된다. 그러나 한병철의 성과사회에서는 규율사회와 같은 외적인 금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자기 스스로가 자신을 착취한다. 결과적으로 성과사회는 광인과 범죄자 대신 낙오자와 우울증 환자를 낳는다. 한병철은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긍정 과잉의 사회 속에서 개인은 스스로를 강제하는 자유, 즉 역설적 자유에 구속된다. 강제하는 자유, 역설적 자유는 현재의 나와 장차 되어야 할 나의 간극을 말한다. 강제하는 자유는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부과하는 것이기 때문에 되어야 할 나에 대한 욕망을 멈추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증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현대 문명은 자기 착취의 사회이며, 일자리를 얻은 성과주체는 완전히 타버릴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이를 한병철은 “자아는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른다. 모든 외적 강제에서 해방되었다고 믿는 긍정성의 사회는 파괴적 자기 강제의 덫에 걸려든다”고 말하고 있다. 성과사회에서 성과주체는 프로이드의 초자아를 이상 자아로 대체한다. 프로이트의 초자아는 억압적이지만 긍정 자아는 긍정적 강제력을 발휘하는, 그래서 스스로는 자유라고 착각하는 자아다. 그래서 현실 자아와 이상 자아의 간극만큼 사람들은 스스로를 학대하는 것이다.

성과주체를 고용한 회사 경영자는 ‘당신은 우리 회사에서 꼭 필요한 인재야’라고 말함으로써 성과주체인 직원의 자녀들과 아내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상사의 말에 고무되어 죽을 둥 살 둥 열심히 일하는 사이에, 생일 케이크에 촛불을 꽂아 놓고 아빠가 오기를 기다리는 아내와 아이들의 절망감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깊어진다. 사실 내가 회사를 그만두어도 회사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 언제든지 나를 대체할 인력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겪은 좌절감은 결코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그 좌절감은 평생에 걸쳐 깊은 상처로 남는다.

이처럼 현대 문명 속에서 우리의 삶이 원자화되고 무의미하게 되는 것은 욕망 때문이다. 시간을 극도로 무상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욕망이다. 욕망으로 인해 마음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마구 내달린다. 그렇지만 그렇게 빠르게 흘러가는 마음과 시간 속에서 우리는 권태를 느낀다. 권태는 결국 시간의 공허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뒤 인간의 궁극적인 삶의 의미는 사라졌다. 과거에 신에 속했던 모든 가치와 의미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에 속했던 모든 역할을 인간이 대신 맡게 되었다. 그것을 실존주의자들은 ‘자유’라고 불렀다. 그렇지만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 없으므로 자유란 결국 무의미한 삶의 과정에서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대구교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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