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영남일보로 보는 인물열전’ .5] 약산 김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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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6-14   |  발행일 2018-06-14 제29면   |  수정 2018-06-15
조국 독립 위해 의열단 만들어 항일투쟁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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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은 대구를 찾아 독립운동에 희생된 동지들의 가족을 만나고 묘소를 참배한 뒤 ‘통일은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영남일보 1946년 2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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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는 전국에서 유수한 도시인 동시 소박 순후한 성격을 가졌으니 그 아름다운 기질을 발휘하여 건국을 위하여 교육·산업·정치 각 방면에 있어 영웅적 기여를 하여주기 바라는 바이다.’

1946년 2월25일 오전 약산 김원봉은 시내 동운정(현 대구시 중구 동인동)에서 대구지역 기자들을 만났다. 그는 이 자리에서 건국도상의 과제에 관해 열변을 토하는 중 대구사람들의 품성 이야기를 꺼냈다. 한마디로 대구사람들은 소박 순후하다고 정의했다. 말하자면 거짓이나 꾸밈이 없으며 온순하고 인정이 두텁다는 이야기다. 그가 마냥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일찍이 그는 대구사람의 정의로움과 선 굵은 배려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대구출신 이종암선생과 의기투합
일본인 암살·관청 폭발 등 가담

광복후엔 분단 안타까움도 토로
정치경험 없어 조선이 분열됐지만
조국 통일에 대한 기대 숨기지 않아
친일경찰에 고초당하자 48년 월북

김원봉은 대구와 가까운 밀양에서 태어났다. 1918년 중국 땅을 밟았고 이듬해 3·1운동이 일어나자 본격적인 망명생활에 들어갔다. 그는 이를 계기로 일본제국주의에 맞서려면 무장투쟁운동이 필요하다고 봤다.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한 까닭이다. 의열단 단장이 된 그는 일본인 암살과 일본관청의 폭발 등 무장투쟁을 주도했다. 엄혹했던 그 시절 의열단은 무장투쟁의 중심이었다. 그런 의열단을 조직하는 데는 대구의 인물이 큰 역할을 했다. 바로 독립운동가 이종암이었다.

대구부 남산정에서 자란 이종암은 16세 때 대구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종암은 대구농업학교와 부산상업학교를 거쳐 대구은행에 입사했다. 그의 이모부가 대구의 재산가였다. 그 덕택에 은행에 들어가자마자 신임을 받았다. 신입사원인 데도 출납계 주임으로 금고열쇠를 맡았다. 하지만 이종암의 가슴속에는 식민지 조선민중이 갖는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호시탐탐 독립운동에 이바지할 기회를 찾고 있었던 것. 연말 분위기로 어수선한 12월 토요일이었다. 그는 은행 금고에 들어있던 현금 1만900원을 갖고 만주로 내달렸다. 독립투쟁자금을 마련해 떠난 것이다. 만주에서 무관학교 과정을 마친 다음해에 3·1운동이 일어났다. 이종암 또한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이즈음 김원봉을 만나 의기투합했고 의열단을 만드는 기폭제가 됐다. 김원봉은 이종암이 경북도의 일제경찰에 체포될 때까지 수십 차례의 항일무장 투쟁을 공동으로 전개했다. 김원봉은 그런 동지가 살았던 대구를 익숙한 도시로 생각했을 것이다. 약산은 고향 밀양으로 가는 길에 대구에서 하루를 묵으며 부민들을 만났다. 이종암 등 독립운동에 희생된 동지들의 가족을 방문하고 그들의 묘소도 참배했다. 그의 머릿속에 그려진 대구는 독립운동의 터전이기도 했다. 대구에서 분단의 안타까움과 통일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았던 그의 발언이 이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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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조선은 분열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분열된 이유는 과거 일제의 압박으로 정치에 대한 경험이 없었던 관계이다. 그러니 물론 통일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자각으로 통일될지 혹은 타력으로 될지는 문제이다.’(영남일보 1946년 2월26일자)

김원봉의 삶은 광복 후에 더 처절했다. 광복된 조국은 그의 바람과는 달리 분단과 분열의 길로 치달았다. 그는 좌우합작을 도모했고 좌익단체들이 모인 민주주의민족전선에도 몸담았다. 그의 자리는 거기까지였다. 광복이 됐음에도 기세등등한 친일경찰에 붙잡혀 치욕을 당한 일은 뒤틀린 시대의 한 단면에 불과했다. 그가 꿈꾸었던 미래는 없었다.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눈앞에 다가오고 신체의 자유마저 위협받자 1948년 월북하고 만다. 그의 독립운동 흔적이 희미해지다 못해 지워질 뻔한 이유였다. 그렇다고 북녘땅인들 달랐을까. 김원봉은 오늘도 소박 순후한 대구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통일은 가능하다.’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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