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고난의 길에서 번영의 길로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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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6-14   |  발행일 2018-06-14 제31면   |  수정 2018-08-28
20180614
박진관 기획취재부장 사람&뉴스전문기자

“1937년 가을 원동(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했어. 열차가 바이칼호수를 지나는데, 석양이 그렇게 아름답더라고. 그때 열대여섯살 되는 형 예닐곱명이 열차 위에 올라가 ‘고향의 친구들아 잘 있어라’라고 하는 석별의 노래를 소리내어 부르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들리더라고. 소련 군인한테 총을 맞아 열차에서 다 떨어져 죽었지.”(89·황 마이 운데이비시)

“1980년 소련군에 입대해 아제르바이잔에서 6개월간 훈련을 받다 야간열차를 탔어요. 밤낮으로 며칠째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어. 타지키스탄에 열차가 도착했을 때 거기서 우연히 동생을 만난 거야. 표정이 어둡더라고. 나는 내가 전쟁터로 가는 줄 몰랐지. 동생은 알았나봐. 아프가니스탄군과 1년6개월간 치열한 전투를 벌였어요. 한 번은 총알이 베레모를 뚫고 지나갔어. 매일 부대원이 한두 명 죽어나갔지.”(57·유가이 비탈리)

최근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에서 20일간 30여 명의 카레이츠(고려인)를 인터뷰하고 귀국했다. 그 중 두 명의 고려인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이야기를 듣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기 때문이다.

과거 100년간 우리는 ‘슬픈 민족’이었다. 망국, 전쟁, 분단으로 수백만명의 이산가족과 유랑민이 생겨났으며 이들은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등 전 세계 각지로 흩어졌다. 이 가운데 특히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동포는 타의에 의해 또 한번 중앙아시아 황무지에 버려졌다. 그러나 이들은 온갖 간난신고를 딛고 인동초처럼 피어나 지금은 다민족국가의 중요한 일원으로 우뚝 섰다.

지난 7일 나는 카자흐스탄 우슈토베 철도역에 있었다. 우슈토베는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들이 처음으로 뿌리를 내린 곳이다. 철로에는 칸마다 석탄을 가득 실은 화물열차가 정차해 있었다. 81년 전에도 저런 화물열차를 타고 갔으리라. 마침 이날 인근 키르기스스탄에서 열린 국제철도협력기구(OSJD) 총회에서 한국이 북한의 찬성으로 4수 끝에 국제철도협력기구 정회원으로 가입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는 향후 부산에서 출발한 한반도종단열차(TKR)가 북한을 거쳐 중국횡단철도(TCR), 시베리아횡단철도(TSR), 만주횡단철도(TMR), 몽골횡단철도(TMGR)와 연결돼 유럽까지 이어진다는 의미다. 바로 ‘기차 타고 유럽 가는 꿈’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족동포가 밀집해 살고 있는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비롯한 동북3성과 러시아 연해주가 ‘기회의 땅’이 되고 고려인동포가 집거해 있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CIS독립국가가 지정학적으로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망국민이 강제로 타야만 했던 고난의 열차는 이제 번영의 열차가 될 날이 머지 않았다.

내가 만났던 고려인·조선족 동포들은 이 땅에 사는 우리보다 훨씬 더 남북의 평화통일을 원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국을 잃은 한을 품고 이역 땅에서 들풀처럼 자란 한민족의 후손들이다. 한 핏줄 한 겨레의 정체성을 잇고자 말과 글을 지키고 있었으며 전통문화를 간직하고 있었다.

유가이 비탈리는 1992년 가을 한국-카자흐스탄 수교를 기념해 자동차로 한국으로 가길 원했다. 실제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자동차 8대를 구입한 뒤 의기투합한 동료와 자동차를 몰고 시베리아를 횡단해 두만강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북한 입국이 거절돼 돌아가야만 했던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유가이 비탈리는 “최근 남북관계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데, 새로운 꿈을 꿔도 될 것 같다”는 희망 섞인 말을 했다. 그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코리안 디아스포라 자동차마니아를 모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다시 자동차를 타고 26년 전 그 길을 거쳐 평양~서울로 가겠단다. 카자흐스탄에서 만났던 강 게오르기 카자흐스탄 국립 아바이사범대 역사학과 교수의 말이 귓가에 생생하다. “이제 남북은 평화의 역사를 되돌릴 수 없다.”박진관 기획취재부장 사람&뉴스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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