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머루포도로 만든 ‘아이스와인’ 우리땅에 맞는 ‘오디와인’ 조주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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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6-15   |  발행일 2018-06-15 제34면   |  수정 2018-06-15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뱅꼬레’ 하형태 회장
영천 머루포도로 만든 ‘아이스와인’ 우리땅에 맞는 ‘오디와인’ 조주
지난 5월 중하순부터 익기 시작한 와이너리 한편의 오디. 가족이 모두 달려들어 이달 말까지 오디 수확에 전념해야 된다. 수확한 오디 앞에서 직접 생산한 오디와인을 지휘봉처럼 흔들고 있는 하형태 회장. 뒤로 뽕나무 밭과 포도밭이 관객처럼 에워싼다.
영천 머루포도로 만든 ‘아이스와인’ 우리땅에 맞는 ‘오디와인’ 조주
좋은 포도를 좋은 와인으로 화학적 변용을 주기 위해선 항상 새로움을 향해 전진해야 된다. 그 역시 수시로 연구실로 가서 달라지는 포도의 화학적 조건에 따른 조주법을 연구한다.
영천 머루포도로 만든 ‘아이스와인’ 우리땅에 맞는 ‘오디와인’ 조주
뱅꼬레는 가족경영라인을 형성하고 있다. 아내와 자식이 모두 하형태 회장을 돕고 있다. 와인 생산에 더 집중하기 위해 지난해 거처를 수성구 시지에서 영천 와인공장 2층으로 옮겼다. 모처럼 와인갤러리 옆에서 사진을 촬영한 일가족.
영천 머루포도로 만든 ‘아이스와인’ 우리땅에 맞는 ‘오디와인’ 조주
현재 까베르네 쇼비뇽 등 15종의 외국 포도를 키우고 있는 뱅꼬레. 여기선 캠벨과 달리 당도가 좋은 MBA(머루포도)를 주품종으로 키우고 있다.

그동안 수성구 시지에서 내 와이너리까지 출퇴근했다. 불편한 점이 많았다. 식구를 설득했다. 영천에 있는 와인공장 2층 숙직실을 살림집으로 개조했다. 그리고 거기로 이사를 했다. 꿈 많은 사업일수록 할 일도 많은 법. 그럴수록 아내는 더 힘들 수밖에. 어쩔 수 없이 아내 표정을 시도 때도 없이 살핀다. 오디 한 번 봤다가 아내 얼굴 한 번 봤다가…. 그렇게 두리번거리며 하루를 땀으로 편집해간다.

금호읍과 고경면에 1만6천500㎡(5천평) 넓이의 과수원이 있다. 포도를 비롯해 머루, 뽕나무, 아로니아, 감나무 등이 심겨 있다. 나의 ‘와인실험욕’은 시도 때도 없고 그냥 무차별인 것 같다. 과채류에 속하는 참외는 물론 대추, 복숭아, 감귤, 레몬, 사과…. 과일이란 과일은 보는 족족 와인으로 만들어 봤다.

요즘이 제철인 오디는 2천680㎡(800평)에 심긴 뽕나무에서 수확된다. 오디 수확이 끝나면 순차적으로 8월에는 아로니아, 9~10월은 포도, 그리고 10~11월은 감이 수확된다. 내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발한 아이스와인을 위해선 포도를 최대한 늦춰 거둬야 한다. 어떤 해는 11월 초에 수확하기도 한다. 하지만 너무 늦어도 너무 빨라도 안 된다. 유럽의 상황은 우리와 좀 다르다.

◆ 한국 토종와인 & 오디와인

난 갈수록 오디와인에 더 열정을 쏟는다. 원래 포도와인이 정통이지만 한국인의 생리엔 왠지 오디와인이 딱인 것 같다. 처음에는 포도와인밖에 몰랐다. 그런데 우리 땅에 맞는 토종와인이 점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한국의 토양에선 포도가 절정의 맛을 갖기 쉽지 않다. 특히 우리의 포도농사는 작황조건이 그다지 좋지 않다. 자꾸 미세먼지가 많아지고 산성비의 강도도 세지고 있다. 산성비를 피하기 위해 비가림막을 치지만 유럽은 그렇지 않다. 카베르네 소비뇽, 시라, 피노 누아르, 메를로, 리슬링 등 15종의 외국 포도종을 과수원 한편에 시험 삼아 키우고 있다. 5년 전부터 처음 만들기 시작한 오디와인은? 경북에선 내가 처음으로 개발한 것이고 전라도와 경기도도 요즘 대중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오디가 다 떨어지고 나면 연둣빛 포도가 점차 자줏빛, 그리고 끝내 검푸르게 변할 것이다.


“OB그룹 경산 마주앙 공장 근무 당시
내가 직접 양조한 포도품종만 100가지
獨·호주 등 세계 유명 와이너리 탐색
실직후 대구 내려와 경북대 와인 강좌
영천 터 잡은후 적합한 포도품종 선택
영천농업기술센터 지원 와인고장 변모”

“포도·머루·뽕나무·아로니아·감나무
1만6500㎡ 과수원 과실 ‘와인실험욕’
와인 잘 만들어도 더 무서운게 마케팅
가족들 영천공장으로 옮겨와 도와 줘”

“초심 흔들리면 국내최장기 숙성 중인
2006년산 뱅꼬레 레드와인 보며 다잡아”


나는 경산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대구로 나와 경북고를 졸업했다. 부모는 의과대에 들어가길 바랐다. 내 분과는 아니었다. 자꾸 농대에 관심이 갔다. 민청학련 사건과 10월 유신이 터지던 1974년 경북대 농화학과에 들어간다. 농화학관은 1호관이었는데 조주실험실이 그 안에 있었다. 난 애주가였고 그래서 실험실에서 만든 수제 막걸리를 남몰래 많이도 홀짝댔다. 내 기질은 이미 양조 쪽으로 기울어진 것 같다.

졸업 후 OB그룹에 들어갔다. 입사 당시 두산 계열 동양맥주공장은 경기도 이천에 있었다. 국내 최대 규모였다. 당시 사내에는 조주 전문가가 2명 있었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경산 마주앙 공장에 갈 사람을 찾고 있었다. 1977년 등장한 마주앙. 이건 한국 와인사에 한 획을 긋는 토종 화이트와인. 국내 대표 미사주로 간택받을 정도로 품질은 국제급이었다.

이에 앞서 1968년 농어촌개발공사(현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일본 산토리사와 합작해 <주>한국산토리를 설립한다. 충남 대전시 원평동에 포도주 공장을 열고 ‘선리 포트 와인(Sunry port wine)’을 생산하지만 이후 해태그룹에 인수된다. 1974년 그 해태주조(현 국순당)가 출시한 게 바로 노블와인이다. 여기에 백화양조(롯데칠성음료 군산공장)와 동양맥주(롯데칠성음료 경산공장)가 국내 와인시장의 3인방으로 등장한다. 바로 여러 주류회사가 가세한다. 진로는 ‘샤토 몽블르’, 금복주는 ‘두리랑’, 부산에 기반을 두고 있는 대선주조는 ‘그랑주아’ 등이다.

◆ 하형태의 마주앙 시대

나는 회사 트럭을 타고 경산으로 내려갔다. 마주앙 경산공장은 대구대 앞 문천지 옆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 공장은 국내 와인의 기념비적 랜드마크였고 지금도 공장은 돌아간다. 나는 마주앙의 문화 만들기에 들어갔다. 시음회를 갖는 등 지역 명사들의 사교장으로 활성화시켜 나갔다.

그때 국내 와인 시장에선 마주앙이 리더였다. 화이트와인 시대였다. 레드와인은 생산량의 10% 정도, 90% 이상이 화이트와인이었다. 레드와인은 와인 초보자에겐 부담이었다. 탄닌의 씁쓸함 때문이었다. 대신 화이트와인은 상큼하고 달콤해 연인들의 ‘작업주’로도 각광을 받는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인데 품귀 현상을 보일 때는 맥주 10상자 정도는 사야 마주앙 한 상자를 끼워주고 그랬다.

마주앙은 순수 국내 기술로 완성된 건 아니다. 세계 최고의 화이트와인 대국으로 불리는 독일의 기술을 많이 갖고 왔다. 내가 아이스와인 양조를 처음 시도한 것은 마주앙 공장에서 근무할 때였다. 내가 양조한 포도품종만 100가지가 됐다. 현장에서는 20t, 30t, 100t 탱크에서 와인을 만들지만 나는 20ℓ 용기로 100가지를 조주했다.

1980년대 해외로 여행하기 어려운 때 난 알래스카를 거쳐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입성했다. 7일간 현지 와인문화를 조사했다. 당시 국내에선 이렇다 할 만한 와인 번역서조차 없었다. 잡지와 전문서적을 해독하기 위해 전문 번역가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독일어를 독파해나갔다. 독일은 정확한 나라였다. 원칙대로 기준대로 하면 정확한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프랑스·미국 등 다른 국가는 달랐다. 그래서 기술을 벤치마킹하기가 어렵다.

벌크와인 수입 때문에 호주에도 6개월 동안 가 있었다. 혼자 동쪽 끝 시드니에서 시작해서 아들레이드, 멜버른을 거쳐 퍼스까지 호주 유명 와이너리를 탐색했다.

◆ 하지만 백수로 돌아온 와인

삶은 항상 허망한 구석이 있다. 1994년 어느 날이었다. 경천동지할 일이 터졌다. 정리해고 통보였다. 3개월 정도 지났을 때 두산그룹은 주류수입 개방에 맞춰 주류 전문 수입회사를 설립했다. 이때 러브콜을 받았다. 그때는 주류 제조회사에서 술을 수입하지 못하게 해서 별도로 자회사를 만들었다. 각 지점을 돌아다니면서 와인을 마실 때의 에티켓 같은 걸 가르쳤다. 방송도 좀 타고 그랬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비즈니스 세계란 그렇게 비정한 구석이 있다. 난 선비 기질이 다분했고 그래서 늘 이용당하기만 했다.

실직하고 대구로 내려갔다. 좋은 제안이 있었다. 경북대 최종욱 교수가 2000년쯤 경북대 평생교육원에서 와인강좌를 열자고 제안한 것이다. 최 교수는 당시 경북포도특화협력단장 자격으로 2011년 7월 영천포도생산자협회와 손잡고 포도판매 다각화에 기여한다. 택배가 되지 않아 전량 계통출하되던 영천 포도가 경북특화협력단의 택배상자 개발로 생산자와 소비자 간 직거래가 가능해진다.

최 교수의 도움으로 난 와인양조 이론과 실습을 병행하는 강좌를 담당했다. 수강생 중에는 현재 경기도 안산 대부도 와인의 리더 격인 김지원 그랑꼬또 대표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영천에 터전을 잡기 시작하고 영천농업기술센터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영천을 와인의 고장으로 조금씩 변모시켜나간다. 그 흐름의 백미가 바로 내 분신인 뱅꼬레다. 영천에 맞는 포도 품종을 골랐다. 영동은 캠벨, 영천은 MBA(머스캣 베리 에이·머루포도)를 주로 재배한다. 기후 때문이다. MBA는 일본 품종으로 가공과 생과 겸용인데 특히 냉해에 약하다. 추풍령 위쪽에서는 재배가 힘들다. 난 MBA로 레드와인을 만들고 싶어서 영천을 택했다.

내가 MBA로 만든 대표 와인은 5가지. 레드와인, 화이트와인, 로제와인, 아이스와인. 그리고 오디와인도 다크호스다. 2006년에 만든 생애 첫 레드와인. 아직도 숙성고에 고이 간직돼 있다. 내겐 작품이다. 아이스와인 탄생비사를 아는가. 수확시기를 놓쳐 포도밭에서 얼어버린 포도를 버리기 아까워 와인을 담갔더니 맛있는 아이스와인이 돼 그걸 지속시킨 것이다. 그래서 국내 첫 아이스와인이 이 와이너리에서 생산될 수 있었다.

독일 아이스와인은 ‘현장에서 얼린 포도로 만들어야 한다’고 법으로 정해져 있다. 지금은 온난화로 인해 독일에서조차 아이스와인을 만들기 어려워졌다. 대신 캐나다가 전 세계에서 팔리는 아이스와인의 90%를 생산한다.

초창기에는 많은 실패도 했다. 얼린 포도를 국내에서 수확하는 건 불가능했다. 우리나라 기후는 습해서 포도를 밭에서 얼리면 썩어버린다. 쭉정이밖에 안 남는다. 요즘은 냉동실 도움을 받으면 된다.

◆ 나의 후기

대기업이 버린 그 토종와인. 그게 어느 날 귀농귀촌한 와인애호가에 의해 부활된다. 나도 그중 한 명이다. 현재 전국 각 지자체 간 와인경쟁이 치열하다.

하지만 와인보다 더 무서운 게 ‘마케팅’. 잘 만드는 건 자신 있는데 잘 파는 건 언제나 어렵다. 보다 못한 둘째딸 세비가 나섰다. 날 닮았는지 와인과 관련이 있는 식품공학과에 진학해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아들 성호도 날 도우면서 양조를 배울 예정이란다. 가족한테 나름대로 인정받은 셈인가?

한국 와인. 너무 구박하지 말자. 한국 과일, 얼마나 맛있는가. 외국에서는 포도로만 와인을 만든다. 그런데 우린 다양한 과일을 접목해서 만들면 된다. 외국에는 우리나라만큼 맛있는 과일이 드물다. 그런 과일들을 가공하는 사업으로 시작된 게 파우치였지만 지금은 와인 쪽으로 가고 있다. 농산물 가공사업 중에서 와인보다 부가가치가 높은 것은 없다. 6차산업의 정수가 바로 와인 아닐까.

햇살과 흙 사이에 걸린 포도. 결국 나의 연장, 포도가 죽으면 내 삶도 사라진다. 그래서 내 삶의 8할은 ‘햇살’이지. 내 화두는 ‘와인’. 사람과의 관계보다 난 자연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 자연과 잘 지내야 내 와인도 ‘쾌청’. 자연에서 신의 한 수는 ‘기도’다. 자연한테는 ‘묘수(妙手)’가 통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하는 방법밖에 없다.

초심이 흔들리면 2006년산 국내 최장기 숙성 중인 뱅꼬레 레드와인을 만져본다. 나도 로마네 콩티나 무통 로칠드 같은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 처음엔 주위로부터 핀잔과 구박을 많이 들었다. 그래서 내 속은 시달릴 대로 시달려 이젠 상당히 무심하다. 와인처럼 많이 시달리면서 비로소 평화로운 것. 아무리 힘들어도 내 길이 있기에 그 힘듦은 내 자존감이고 저력 아니겠는가. 한국 와인 파이팅!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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