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앞산 자락길 트레킹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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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6-15   |  발행일 2018-06-15 제37면   |  수정 2018-06-15
“숲속에 내가 있었으나, 이제 내 속에 숲이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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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싱그러운 앞산자락길의 정겨운 풍경(위)과 고려 태조 왕건이 피신했다는 앞산 왕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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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일사에서 왕굴 가는 길에 만나는 소원성취 돌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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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굴 위 너럭바위에서 바라본 연무 자욱한 대구 시가지.

숲과 숲 사이 오솔길이 있다. 달비골 갈림길이다. 달빛이 긴 계곡에 두루 비친다는 달비골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간밤을 보내면서 달빛의 방울을 목에 단, 바람은 내 몸 사이사이로 빠져 나간다. 싱그러운 초여름의 숲은 오히려 쓸쓸했다. 앞산 자락길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이것도 버리고 저것도 버린다.

저 숲 밖의 현실은 너무 치열하다. 마치 움직일수록 더 빨리 깊이 빠지는 늪처럼.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까치 한 마리 까악 까악 울며 날아간다. 저 소리가 그토록 뼈저린 것인 줄 몰랐다. 까치 소리가 나를 적시고 허공에도 길을 낸다. 길은 다 이어져 있다. 길은 내 마음으로 흘러 들어와 번뇌를 솎아서 움켜쥐고 빠져 나간다. 길은 도(道)다. 저 눈부신 초록의 숲은 우아하고 내공이 깊다. 구부러진 소나무 숲길이 나타난다. 보일 듯 말 듯한 자락길이 구불구불 간다. 작은 오르막 내리막이 자주 등장하고, 그건 생의 한때 작은 파도처럼 무릎에서 출렁인다.

달빛이 계곡에 두루 비친다는 달비골
오전햇살에 진한 솔 향 내뿜는 솔숲
지옥가는 중생용서 지장보살 지장사
소나무가 많은 솔고개 ‘송현’ 매자골

황룡사∼안지랑골 1.1㎞ 소원성취길
마을 안녕 수호 무당골·솟대·돌무더기
왕건이 견훤에게 대패 후 숨은 왕굴
피란후 편히 쉬어 이름 붙여진 안일사
걸으며 본성 회복하는 행복한 자락길


상인 배수지를 지난다. 자락길은 더 심오해진다. 누가 걸어도 기분 좋은 편안하고 유쾌한 길이다. 솔숲은 오전 10시의 햇살에 진한 솔향을 쏟으며 가장 아름다운 풍경 한 장을 완성한다. 간혹 산자락 길을 걷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지만, 이런 시적 구성에서의 조우는 묵언이고 경청이며 공감이다.

지장사가 나타난다. 지장보살을 모시는 절이라는 뜻이다. 지장보살은 무한한 용서를 하는 보살로 벌과 고통을 받게 내버려두어야 할 중생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지장보살은 지옥문을 지키고 있으면서 지옥으로 가는 중생을 못 들어가게 하고, 지옥마저도 부수어서 그 속에서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한다. 지장보살의 위대한 힘은 말로 하기 어렵고, 잠깐 사이 보고 한순간만 생각해도 그 복덕을 무량하게 받는다고 한다.

게시판에 “이 세상에 영원한 것도 없고, 깨달은 사람에게는 흔들림이 없다”고 적혀 있다. 보고 그냥 지나간다. 청소년수련원과 대덕승마장 위의 자락길로 들어선다. 역시 숲은 비밀스럽다. 처음에는 숲속에 내가 있었으나 지금은 내 속에 숲이 있다. 이제 숲은 내 속에서 무한한 피톤치드를 뿜어내면서 나를 치유하는 비밀의 숲이 되었다. 꽃무릇 안내 글이 보인다. 꽃 무릇의 별명은 피안화(彼岸華)다. 9~10월경에 꽃이 완전하게 진 후 잎이 자라나 눈 속에 겨울을 보내고, 여름에는 자취도 없이 지내다가 가을이 되면 다시 붉은 꽃을 피우는데, 그 모습이 현생의 고통에서 벗어나 열반의 경지에 오른 것으로 여겨져 그렇게 부른다. 이러한 연유로 꽃무릇은 흔히 절에서 많이 심는다.

매자골에 닿는다. 매자골에도 옛이야기가 있다. 지금부터 300여 년 전 대덕산에 성기 도사가 수행하고 있었다. 성기 도사는 이 골의 지세를 목형(木形)으로 보았다. 어느 해 봄날 이 골짜기에 매화가 홀연 피더니 구암동(현 송현동)에 떨어졌다 하여 매자골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무언가 석연찮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그냥 그렇게 넘어가는 것이 좋다. 길도 인생도 그렇게 가는 것이다. 솔숲이 한층 더 우거져 쾌적하다. 이 지역은 송현동이다. 소나무가 많은 고개가 있어 ‘솔 고개’ 또는 ‘송 현’이라 불렀다고 한다.

◆소원성취길 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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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일사에서 왕굴 가는 길에 만나는 소원성취 돌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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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랑골에 있는 고찰 안일사의 초파일 연등과 대웅전.



매자골 황룡사에서 안지랑골까지 1.1㎞가 소원성취길이다. ‘이 길을 걸으신 당신은 건강 수명이 34분24초 연장되셨습니다. 체중 60㎏ 기준, 분당 속력 65m, 3.6㎉ 소비’가 적혀 있다.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세밀하게 적어놓았는지 모르지만 걷기가 건강과 수명에 좋다는 것에는 무조건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골안골에 도착한다. 아래에는 추억의 명소인 앞산빨래터공원이 있다. 골안골은 광복 이후 무당이 많이 모여들어 무당골 또는 골안골로 부르게 된다.

돌무더기와 솟대도 있다. 솟대는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장대나 돌기둥 위에 앉힌 민간신앙 대상물로 마을의 안녕과 수호, 농사의 풍년 그리고 마을에 경사가 있을 때 경축의 뜻으로 마을 입구에 세웠다. ‘샛길 이제 그만, 앞산은 원시적인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애원합니다’ 안내판도 있다. 그 환상적인 솔숲을 걸어 드디어 안지랑골에 도착한다.

안지랑이 또는 안지랭이라 불리는 이곳은 수많은 피서객의 사랑을 받았던 곳으로, 멀리서 안지랑이 계곡을 보면 마치 물안개인 안지랑이가 가득 핀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그리 부른다고 한다. 여러 가지 유래가 있으나 왠지 이 유래가 감성을 자극한다. 여기서 안일사까지는 가파른 길이다. 허적허적 올라간다.

안일사는 신라 경순왕 때 창건했다고 하나 추측일 뿐이다. 앞산에서 내려온 산맥이 비경을 이룬 큰 암벽 아래 대웅전이 있고 그 안에 글귀가 있다. ‘세상은 끊임없이 불타고 있는데, 너희는 어둠 속에 둘러싸인 채 어찌하여 등불을 찾지 않는가?’(법구경)

읽어 보니 정신이 아득하다. 여기서 불타는 것은 마음이고, 어둠은 탐진치 삼독이며, 등불은 불법이라고 나름의 해석을 한다. 대웅전 외벽의 불화를 본다. 석가모니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을 이루고 미녀들의 유혹을 받는다. 석가모니께서 이 장애를 훌쩍 건너가신다. 미녀들의 향기와 살점의 유혹을 물리치는 것은 가장 어려운 관문이다. 이렇게 하여 석가모니는 생물인 인간에서 깨달음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길을 밝혀주셨다. 그것이 등불이다. 석가모니는 이렇게 말씀하신 적도 있다. ‘색욕(色慾·성적 욕망)과 같은 것이 하나만 더 있더라도 세상에 수행할 이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또 이런 경구도 있다. ‘수행자로서 여성과 잠자리를 가지느니 독사의 아가리에 자신의 거시기를 집어넣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수행자가 넘어서야 할 가장 높은 벽은 바로 색욕이라는 것이다. 여타의 불화도 있지만 그냥 꿀떡꿀떡 삼키고 넘어간다.

왕굴로 오른다. 앞산에 있는 안일사와 왕굴은 고려태조 왕건과 연관이 있는 이름이다. 안일사를 답사하고 왕굴을 오르면서 앞산의 역사적인 스토리텔링을 되살려본다. 안일사는 처음 사명이 유성사였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공산전투에서 후백제 견훤에게 대패한 후 은적사에 3일간 머물고, 다시 왕굴에 와서 피신한 뒤 이곳 안일사에서 편하게 피란하고 쉬어 갔다고 해서 안일사라 부르게 되었다. 10여 분 오르자 소원성취 돌탑이 나온다. 여기는 원래 너덜지대였고, 사람 키보다 약간 큰 돌탑이 여럿 군(群)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을 허물고 하나의 큰 돌탑을 쌓았다. 수십 년 전 앞산에 등산왔다가 소원성취 탑을 쌓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돌을 들고 쌓는 탑으로 날다람쥐처럼 올라가는 그를 보고 감탄해 통성명했다. 평리동에서 철학관을 하고 있는데, 꿈에 앞산 산신령님이 나타나 이 자리에 큰 돌탑을 쌓으라고 계시하셨다고 한다. 혼자 힘으로 평리동에서 여기까지 온 그의 돌탑 신앙에 신비함을 느낀다. 20여 분 더 오르자 왕굴에 도착한다. 왕건이 견훤군의 추적을 피해 숨어 있었는데, 견훤군이 이 동굴에 다다르자 갑자기 운해가 가득하고 왕거미가 줄을 쳐서 사람 흔적을 없애 왕건이 무사했다는 굴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탐방한다. 그 자연친화적인 자락길과 고찰을 탐방하면서 나다 너다 하며 나누는 분별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진정한 행복은 본성을 회복하도록 반성하고 자정하는 데서 온다. 앞산 자락길은 우리 본성을 회복할 수 있는 행복한 길이었다.

글= 김찬일 시인 대구 힐링 트레킹 회장 kc12taegu@hanmail.net

사진= 김석 대우여행사 이사

☞여행정보

▶트레킹 코스: 달비골 관리사무소 앞 - 앞산 자락길 - 상인배수지 - 지장사 - 매자골 - 골안골 - 안지랑골 - 안일사 - 소원성취탑 - 왕굴 - 안지랑골

▶문의: 대구시 앞산공원관리사무소 (053)803-5450 ▶내비 주소: 대구시 남구 대명동 앞산 순환로 574-87 ▶주위 볼거리: 앞산 빨래터 공원, 청소년수련원, 대덕문화전당, 원기사, 도원지, 큰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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