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대구 달성 가태리 예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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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6-22   |  발행일 2018-06-22 제36면   |  수정 2018-06-22
곽재우·곽준 장군 신도비 곁 400년간 忠臣 수호 느티나무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대구 달성 가태리 예연서원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대구 달성 가태리 예연서원
곽재우의 재실인 경충재 솟을대문.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대구 달성 가태리 예연서원
구례마을 안길을 오른다. 마을 가장 안쪽에 곽준 나무와 예연서원이 위치한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대구 달성 가태리 예연서원
구례마을 앞의 대파밭. 수확을 놓치고 꽃밭이 되었다.

싸아 싸아 시원한 보리파도 소리, 한정리 버들밭들이 분주하다. 한쪽에선 보리 베는 트랙터의 경쾌한 엔진 음이 울려퍼지고 또 한쪽에선 마늘 수확하는 몸짓들이 다망하다. 빈 들에 꼿꼿이 선 마늘 망태자루들이 초여름 들녘에 치하를 보낸다. 들 지나면 고개다. 유의태 고개·유태고개·의태고개·이태고개라 불리는 길, 옛날 유의태가 창녕으로 가면서 이 고개를 넘었단다. 고개 넘으면 바다마냥 큰 물이 나타난다. 달창(達昌)저수지다. 달성의 달(達), 창녕의 창(昌) 자를 딴 이름으로 달성에서 제일 큰 저수지다. 긴 고무장화 신은 사내가 물에서부터 불쑥 나타나더니 길가 곰탕집으로 사라진다. 식당 앞마당 무쇠 솥에선 하얀 연기가 풀풀 오르고, 뒷마당 살구나무는 자꾸만 자꾸만 툭툭 열매를 떨어뜨린다. 살구 향 흐드러진 길에 예연서원 1.6㎞ 이정표가 서있다.


가태리 구례마을 가는 길 더없이 고요
모내기 완료한 논과 보리 베는 사람들
유가·현풍·구지들 적시는 달창저수지
마을 앞 안개처럼 몽실몽실한 대파 꽃

곽재우·곽준 장군 ‘땀 흘리는 신도비’
마을 끝 높은 곳에 자리한 ‘예연서원’
수령 300년된 곽준나무도 아래로 보여
위패 모시는 충현사·대청에 향사 흔적
세월 흘러도 유가적 전통은 계속 이어져


◆ 가태리 구례마을

마을로 가는 길은 꽤나 길다. 너른 골짜기 가태들을 오른쪽에 끼고 굴렁굴렁 오래 들어간다. 마주 오는 차가 있다면 난처할 길이지만 들고 나는 이는 드물다. 들은 물 댄 논, 모내기를 완료한 논, 보리밭 등으로 꽉꽉 채워져 있다. 보리 베는 몇 사람의 움직임만이 보일 뿐 더없이 고요하다. 가태리 구례마을 가는 길이다.

가태리(佳泰里)는 경치가 아름답고 산이 크고 마을이 앞으로 번창한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비슬산(琵瑟山)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의 서사면(西斜面) 산지가 가태리대부분을 차지하고 달창저수지의 2할 정도가 가태리에 속해 있다. 비슬산에서 차천(車川)이 흘러내려 만들어진 곡저평야가 가태들이다. 차천은 달창저수지로 유입되어 창녕군 북단과 유가읍, 현풍·구지면의 광활한 농경지를 적시고 다시 한정리 버들밭들과 평촌리 평촌들 등을 이루고는 낙동강과 하나 된다.

들이 조금씩 좁아진다 싶을 때 야트막한 능선에 둘러싸인 마을이 나타난다. 마을 앞이 꽃밭이다. 안개처럼 몽실몽실한 꽃밭이다. 대파 밭이다. 대파가 이렇게나 키가 컸나, 대파 꽃이 이렇게나 희고 동그랬나. 마트에 진열된 파에 익숙한 눈은 파밭에, 파 꽃에, 속절없이 홀린다. 그러나 파꽃은, 근심이다. 출하시기를 놓쳤거나 출하를 포기했다는 뜻이다. 한 무리의 붉은 양귀비가 밭둑에서 살랑거린다. 니 맘 다 안다고. 이곳이 구례(求禮)마을이다. 이 마을에 서원이 있다고 해서 구례다. 서원은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와 존재(存齋) 곽준(郭逡)을 모시고 있는 예연서원(禮淵書院)이다.

◆ 곽재우와 곽준

파밭을 바라보며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수령 400여 년의 이 나무는 곽재우 나무라고 불린다. 나무 뒤에는 아주 커다란 비각이 자리한다. 비각 안에는 아주 거대한 곽재우의 ‘홍의장군신도비(紅衣將軍神道碑)’와 곽준의 ‘충렬공신도비(忠烈公神道碑)’가 나란하다.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이 거대한 비는 땀을 흘린다고 한다. 그래서 별명이 ‘땀 흘리는 신도비’다.

곽재우는 현풍 사람으로 외가인 의령에서 태어났다. 32세에 과거에 급제했으나 선조 임금은 답 내용에 불손한 면이 있다 하여 합격을 취소시켰다.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향리에 은거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는 제일 먼저 사재를 털어 의병을 일으켰다. 전후 조정의 모함에 두 손 들고 벼슬을 버리고 떠나갈 때는 신 한 켤레에 말 한 필뿐이었다 한다. 사후 곽재우 장군은 충익공(忠翼公)에 제수됐다.

곽준은 곽재우 장군의 부친과 6촌간이라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 때 함양의 황석산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때 아들 이상(履常)과 이후(履厚)가 아버지의 곁을 지키다 살해되었고, 딸은 남편 유문호가 잡혔다는 말을 듣고 자결하고, 며느리도 자결했다. 충(忠)과 효(孝)와 열(烈)을 실천한 ‘일문삼강(一門三綱)’의 집안이었다. 전투는 패하여 성이 함락되었지만, 왜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어 조선정벌 계획을 전면 수정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곽준의 신도비는 1663년에 처음 세워졌다. 원래 자리는 현풍면 대리로 현풍곽씨 집성촌이다. 이후 1691년 이곳에 곽재우의 신도비를 세우면서 곽준의 신도비를 옮겨왔다. 6·25전쟁 때 비각은 소실되고 신도비는 손상되었다. 이후 신도비는 1957년 정부가 주관하여 원형에 충실하게 복원했고 유림에서 비각을 세웠다. 지금의 비각은 2010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귀부가 순박한 사람의 얼굴을 닮아 있다.

◆ 예연서원

좁은 마을안길을 오른다. 담벼락 아래 텃밭을 지나고 흙돌담 앞 접시꽃을 지나면 작은 동산이라 할 만한 높직한 대 위에 대단한 위용의 은행나무가 치솟아 있다. 수령이 300년 정도 된 이 나무는 곽준 나무다. 예연서원은 은행나무 뒤편, 마을의 끝에 높이 자리한다. 외삼문에 오르면 대단한 은행나무조차 아래로 보인다.

예연서원(禮淵書院)은 광해군 10년인 1618년에 곽재우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대리 솔례마을에 충현사(忠賢祠)로 처음 건립되었다. 현종15년인 1674년에 현감 유천지(柳千之)가 규모를 확장하면서 곽준의 위패를 함께 봉안했고 숙종 3년인 1677년에 예연서원으로 사액 받았다. 현재의 위치로 이건한 것은 1715년이다. 고종 5년인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이후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에 유림에 의해 다시 세워졌으나 6·25 전쟁 때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典祀廳)과 서고인 장판각(藏版閣)만 남고 모두 불탔다.

현재 예연서원에는 강당인 경의당(景義堂)과 사당인 충현사가 중건되어 있고, 서원 왼쪽에는 곽재우 장군의 재실인 경충재(景忠齋)가 있다. 강당 대청에 사람들의 이름을 적은 한지가 붙어 있다. 정유년 9월이라는 것을 보니 지난해 향사의 흔적인 듯하다. 세월은 지났지만 유가적 전통은 끊어지지 않고 계승되고 있다. 멀리 속눈썹 같은 달창지가 보인다. ‘바위 사이라 개 짖으니 메아리 소리 들려오고/ 물속에 갈매기 나니 외로운 그림자 비치네/ 강호라 한가로워 속세 일 없으니/ 달 밝은 낚시터엔 한 단지의 술이라네.’ 곽재우의 강사우음(江舍偶吟)이다. 가까이 파밭이 그렁그렁 희다. 우음(憂音)이 들린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정보

대구에서 달성 현풍 방향 5번 국도로 간다. 현풍면 지나 마산 방향으로 조금 더 가다 ‘한정1,2, 가태, 달창저수지’ 이정표에서 빠져나가 달창로로 계속 가면 된다. 달창저수지 이정표를 따르면 쉽다. 저수지 초입 금산곰탕 옆길로 1.6㎞ 정도 들어가면 구례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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