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가지 향기나는 약초 ‘칠향계 삼계탕’ 메밀 직접 갈아 반죽한 ‘서부냉면’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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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6-29   |  발행일 2018-06-29 제34면   |  수정 2018-06-29
[이춘호기자의 푸드로드] 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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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리서를 토대로 풍기인삼을 재활용한 풍기식 삼계탕인 칠향계를 개발한 김인자 사장이 영계의 기름을 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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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향계 삼계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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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피란민의 애환이 들어가 있는 영주의 냉면1번가로 불리는 서부냉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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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냉면은 지금도 메밀가루를 직접 갈아서 수작업으로 면을 빼낸다.

계유정난을 통해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 그는 자꾸 자신을 부정하는 동생인 금성대군을 순흥도호부(현 순흥읍사무소 자리) 소수서원 옆 금성단 자리로 ‘고향안치’란 유배형을 내린다. 이때 순흥부사 이보흠과 뜻이 맞아 재차 단종 복위 거사를 꾸미지만 결국 관노가 밀고하는 바람에 들통이 나버린다. 당시 풍기현감이던 김효급이 이 사실을 세조에게 알린다. 격노한 세조가 피의 숙청을 시작한다. 일단 순흥도호부부터 초토화시킨다. 1457년이다. 이후 227년간 순흥은 사라진 유령 같은 고장이 된다.

당시 죽계천 청다리(일명 제월교) 아래는 집단살육장이었다. 관련자의 식구를 모조리 베어버렸다. 흘린 피가 죽계천을 따라 10리를 떠내려갔다. 피가 멈춘 곳이 바로 ‘피끝마을’이다. 금성대군은 능지처참. 그래서 시신도 못 찾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당시 불탄 은행나무 탄목(炭木)에서 싹이 돋아났다.

그게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수령 500년이 넘는 ‘압각수(鴨脚樹)’다. 압각수는 잎이 오리 발가락을 닮은 은행나무의 별칭이다. 압각수는 이제 365일 금성대군신단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청다리 밑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아이도 있었다. 이들을 발견한 관군은 차마 확인사살할 수 없어 몰래 한양으로 데려가 키웠다고 한다. 청다리 이야기는 구전돼 민가로 흘러든다. 말썽 부리는 어린아이들을 놀려줄 때 부모들은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말했다. 그 다리가 바로 청다리다. 그런데 일제는 선비정신을 말살시키기 위해 ‘다리 밑에서 주운 아이가 실은 방탕한 소수서원의 유생들이 기생과 통정해 낳은 아이’라고 왜곡시킨다.

역사상 두번 사라진 항거의 고장 순흥
소실된 초암사와 금동미륵반가사유상
평안도 유민의 재산 베틀…인견 메카로
소백산 토질·골바람, 산삼 재배지 적격
풍기읍 5곳 인삼시장…5년근 이상 취급

칠향계 삼계탕 전국에 알린 김인자씨
12시간 달인 약초물에 영계 넣고 끓여
닭속 곡물은 넣지않아…국따로 밥따로

소수서원 유생들 기력보충한 ‘치계탕’
꿩탕·문어숙회·인삼떡화채‘선비반상’


◆역모의 도시 순흥

도호부였던 순흥은 관할지역이 광대했다. 북으로 강원도 영월군, 태백시, 서로는 충북 단양군 일부, 동으로는 울진군 일부, 서남쪽으로는 예천군 일부, 동남쪽으로는 예안(안동)까지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순흥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영천(榮川, 영주 지역의 옛 지명), 풍기, 봉화 등으로 갈갈이 찢겨 버린다.

주세붕은 정축지변 당시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이 밤마다 울부짖는 소릴 듣게 된다. 이들을 달래기 위해 죽계천변 바위에 붉은 글씨로 ‘경(敬)’ 자를 새긴다. 1550년 순흥 땅에도 온기가 돋아난다. 그 온기가 바로 소수서원이다. 퇴계가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을 더 챙겨달라고 간청했다. 명종이 친히 글을 써 편액을 보낸다.

그렇게 기사회생한 순흥도호부. 하지만 또 시련이 닥친다. 1907년 11월10일. 일제는 500여명의 소백산의병을 소탕하기 위해 순흥을 깡그리 불태운다. 일제는 이때 ‘폐부작군(廢部作郡)’을 단행한다. 순흥도호부를 없애고 새로 영주군을 만든 것이다. 이게 영주의 출발이다. 이때 초암사도 함께 소실된다. 초암사는 의상대사의 생애 첫 사찰이다. 거기에 천품의 불상 하나가 봉안돼 있었다. 그게 바로 국보 78호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이다. 이 불상은 일본 순사, 일본인 골동품상 등 여러 손을 거치다가 결국 일화 4천엔에 경성박물관에 팔린다. 나중엔 데라우치 총독의 관저, 광복 이후엔 이왕직박물관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에 안착된다. 천신만고·우여곡절의 불상이다. 순흥의 삶과 너무나 닮은 꼴이었다.

순흥과 맞물려 돌아가는 풍기. 소백산의 기운을 제대로 받아내고 있다. 예전부터 양백지간이 화를 면할 수 있다고 했다. 그게 비결서인 ‘정감록’의 시크릿이었다. 양백지간은 소백과 태백산. 그 사이를 파고든 고을이 풍기읍 금계리다. 개화기 때 평안도와 황해도 유민이 여기로 숨어든다. 이들이 남하할 때 갖고 온 귀중한 재산 중 하나가 바로 베틀이다. 그걸로 인견을 짰다. 풍기는 졸지에 대한민국 인견의 메카가 된다. 지금도 국내 인견 유통량의 86%를 풍기에서 생산한다.

풍기의 양대 명물은 인삼과 인견. 인견은 마케팅 부족으로 지금은 많이 시들해졌지만 인삼은 갈수록 위세를 만방에 떨치고 있다.

◆주세붕과 풍기 인삼 이야기

소백산 산세도 권역별로 다르다. 단양권은 석기(石氣)가 성성하고 영주권은 토기(土氣)가 압도적이다. 그래서 인삼농사는 풍기가 압도적일 수밖에 없다.

소백산의 토질, 그리고 죽계천의 물, 한결같은 골바람. 해발 200~300m 고지의 선선한 기후. 이 모든 것이 풍기인삼을 발화시키는 수호천사다.

풍기인삼의 산파역은 주세붕이다. 신라, 고려 등을 거치면서 ‘산삼공납폐단’ 때문에 전 국토가 피폐해질 정도였다. 특히 원나라는 툭하면 조선산삼 타령이었다. 이때 주세붕이 발상의 전환을 한다. 굳이 귀한 산삼을 공납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대신 재배한 산삼을 공물로 보내면 된다고 판단한다.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그는 산삼의 종자를 잘 받아낼 토질을 찾아봤다. 풍기만 한 데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조선 중기 이전까지 인삼은 ‘산삼’을 의미한다. 주세붕 이후 재배 인삼은 모두 ‘가삼(家蔘)’이라 했다. 이제는 산에서 자생하는 건 산삼. 사람이 재배한 건 인삼으로 분류된다.

인삼은 특허품목. 아무나 경작할 수 없다. ‘인삼경작면허증’을 가져야만 가능했다. 1908년 풍기에서 기념비적 단체가 태동한다. 1969년 생긴 농업협동조합보다 더 빨리 ‘풍기삼업조합(풍기인삼협동조합)’이 생겨났다. 전매청도 회신을 통해 풍기가 전국 첫 인삼시배지임을 확인한다.

현재 인삼농협, 인삼박물관, 풍기특산품영농법인, 풍기인삼공사 등이 있다. 인삼재배농가는 지난해 말 기준 912농가. 인삼은 한번 재배를 하면 연작이 불가능하다. 최소 5년 이상 휴경해야 된다. 이때 풍기인삼주는 근처 단양, 예천, 봉화 등지로 이전해 재배한다. 풍기읍내에 인삼장이 5곳이다. 풍기역 앞 인삼시장, 그리고 토종인삼시장, 선비골인삼시장 등이다. 매년 10월 말 인삼 수액이 뿌리로 내려온다. 그때가 수확 적기다.

수삼도 등급이 있다. 하급품은 ‘깎끼’라 한다. 중급은 ‘황’, 6년근 중 가장 완벽한 모양을 갖추면 ‘천종’이란 칭호를 받는다. 한 채(600g) 10만원 이상에 거래되고 진액으로 만들면 30만원 이상. 천종은 반드시 다리가 2개여야만 한다. 3~4개로 벌어지면 하급품. 이런 건 타 도시 삼계탕집, 건강원 등으로 팔려간다. 황 급은 홍삼공장으로 팔려나간다. 마블링 감별사처럼 인삼선별전문가가 있다. 풍기에만 100여명이 활동한다. 이들은 수확기 출장 감별도 해준다.

풍기인삼도 밭에서 자라는 밭삼과 산에서 자라는 산삼으로 나뉜다. 풍기인삼은 거의 산삼. 이 씨앗을 ‘인삼딸’이라 한다. 이걸 직파해 키우기도 하지만 대다수 종포장에서 1년 정도 키워 2㎝ 정도 뿌리를 낸 뒤 본포장에서 이식, 5년 정도 키워 출하한다. 6년근 이상은 없다. 그 이상이면 썩기 시작하는 등 상품성이 급격하게 추락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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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읍에는 모두 5군데의 인삼시장이 있다. 여기 인삼은 5년근 이상 돼야만 시장에 나올 수 있다. 가장 좋은 건 다리가 두 개인 천종. 한 채에 10만원 이상에 거래된다.

◆칠향계를 찾아서

풍기와 순흥 사이를 오가다 보니 몸 곳곳에 인삼 향취가 파고든다. 이 향취 때문인지 오뉴월 더위 속에서도 가을의 기운이 살짝 감지된다. 지기(地氣)란 고정불변, 대체품이 불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폭염을 뚫고 풍기인삼의 향기를 품은 삼계탕집인 ‘칠향계(七香鷄)’로 발길을 옮겼다. 칠향계는 풍기관광호텔 바로 뒤에 있다. 갓 예순을 넘긴 김인자씨. 그는 ‘인삼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다. 남편이 늘 비지땀으로 그녀를 호위한다. 부부의 집안은 한때 영주에서 짱짱한 가세를 자랑했다. 인견공장 덕분이다. 그런데 인견이 하향길을 타면서 가세도 함께 기운다. 부부는 집 밖으로 나앉게 됐다. 아내는 단양의 한 유명 갈빗집으로 간다. 1년간 식당업 관련 혹독한 수업을 받는다.

2011년 아내가 발심을 한다. 영주 선비문화축제 부대행사 중 하나인 전국삼계탕요리대회에 출전한다. 출전해서 대상을 받았는데 그 음식이 바로 칠향계다. 그녀는 약선음식에 대해 깊이 궁리했다. 산림경제, 고사십이집, 군학회등, 규합총서 등 여러 고조리서를 보면서 칠향계 관련 자료를 탐색했다. 삼계탕을 먹을 때마다 인삼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한 삼계탕을 만들고 싶었다. 칠향계는 400년 전 장수들의 보양식으로 유명했다는 기록도 찾아냈다. 일단 인삼명인 김재윤씨의 인삼을 축으로 거기에 맞는 약재를 찾아나섰다. 그렇게 해서 인삼, 잔대, 하수오, 백복령, 천초, 황기, 도라지 등 모두 7가지 향기가 나는 약초를 한데 집성했다. 그 결과가 칠향계다.

약선식은 맛 내기가 참 어렵다. 짙은 약초 향기가 음식 고유의 향미를 빼앗아가버리기 때문이다. 대다수 약선식당이 망하는 이유다. 일단 닭기름과 이별하기로 했다. 닭에서 형성되는 기름을 모두 제거했다. 한꺼번에 스무 마리의 영계를 삶는다. 그때 생긴 기름은 모두 버린다. 그 닭을 다시 찬물에 30분 담가놓는다. 형성된 기름을 재차 제거한다. 12시간 달인 약초물에 영계를 넣고 한 번 더 끓여준다. 칠향계는 참 말갛다. 뿌옇고 걸쭉한 버전이 아니다. 여느 삼계탕처럼 닭 속에 갖은 곡물을 넣지 않는다. 선비고장답게 삼계탕도 국 따로 밥 따로 방식이다. 말린 우엉 달인 물로 찰밥을 짓는다.

◆선비반상

순흥의 ‘순(順)’ 자는 내 천과 머리혈의 합성자. 하천의 최상류란 의미다. 바로 낙동강의 시원지란 의미다. 그동안 강원도 태백시 황지를 낙동강 시원지로 주목했는데 현재는 순흥의 죽계천, 문경의 영강도 낙동강 1천300리 3대 시원지로 평가받는다. 이 세 강줄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지점은 예천에 있고 그 지점에 낙동강 마지막 주모로 불렸던 유옥연 주모가 꾸려갔던 삼강주막이 있다.

선비고장에 당연히 ‘선비밥상’이 있어야지. 그런데 고증이 쉽지 않아 지난해 겨우 ‘선비반상’이 윤곽을 드러낸다. 2016년부터 영주시우리향토음식연구회가 연구를 시작한다. 일단 소수서원 물목 식자재를 참고했다. 그렇게 해서 생치(꿩)와 닭을 소재로 한 ‘치계탕’이 개발된다. 소수서원 유생들이 기력보충을 위해 먹던 보양식이다. 치계탕은 어쩜 칠향계의 선배 격인지도 모른다. 선비반상은 속을 다스리는 인삼속미음, 조밥, 퇴계 이황이 서원의 유생들을 생각해 보냈던 꿩탕, 그리고 영주에서는 절대 빠질 수 없는 문어숙회, 후식으로 인삼떡화채 등을 올렸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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