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의 쉼표, 이야기 따라 포항여행] ⑤ 장기유배문화체험촌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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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7-03   |  발행일 2018-07-03 제13면   |  수정 2018-08-21
송시열·정약용도 머물러…형벌의 땅에 ‘文風’ 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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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촌 입구의 유배체험 마당에는 죄인을 유배지로 보낼 때 사용하는 우마차와 병졸을 재현한 조형물이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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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촌 내 우암 송시열 적거지 앞에 옛 지도가 새겨진 원형 돌판이 자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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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촌 내 우암 송시열 적거지에는 우암의 모습을 묘사한 인형이 전시돼 있어 생동감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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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촌 중심부에는 조선시대 때 장기에 유배된 인물들을 기록한 ‘105인 기록 이야기벽’이 자리하고 있다.

포항시 남구 장기면 서촌리 285 일원에 장기유배문화체험촌이 조성되고 있다. 포항 장기는 유배 문화라는 특별한 경험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사화와 당쟁의 소용돌이에 부침하여 불우하게 유배됐던 관리와 지식인들. 이들 중에는 학문적으로 걸출한 인물이 많아, 유배지를 중심으로 새로운 학풍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어, 유배의 좌절을 새로운 기운으로 바꾸어놓기도 했다. 장기는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 등 석학에서부터 중앙정계에서 내로라하던 정객들이 머물면서 학문연구와 문풍이 되살아난 대표적인 곳이라 할 수 있다.

첩첩산중·바다에 둘러싸인 장기면
예부터 사대부 유배지로 많이 이용
조선왕조 500년간 100명 넘게 유배
전국에서 많은 선비들이 드나들어
곳곳에 후학 가르치는 서원 생겨나


#1. 우암과 다산, 장기에 유폐되다

우암 송시열이 장기현으로 귀양 온 것은 조선조 숙종 원년(1675) 윤 5월이었다. 당시 노론의 영수였던 그가 이곳에 안치된 것은 임금과 왕후의 사후 상복을 입는 기간을 두고 벌인 이른바 복상문제 논쟁에서 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산촌 오도전이라는 이의 집에서 4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머물던 초가집은 가시 울타리가 쳐졌다. 위리안치였다. 그런 가운데 그는 꾸준히 학문에 힘써 ‘주자대전차이’와 ‘이정서분류’ 등의 명저를 저술했고 많은 양의 시문(詩文)도 창작했다. 그는 숙종 5년(1679) 4월10일 자신이 머물던 사관 안에 홀연히 자생한 느티나무를 베어 지팡이를 만들어 짚고 죽교에 올라 거제도로 떠났다.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이 남인들이 기거하는 지역에 유폐됐으나, 기실 유배지에서의 그의 정치적 입장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학문적 감화력은 커서 지역민들은 그를 통해 유학의 핵심과 중앙정계의 움직임을 접할 기회를 가졌다.

우암이 머물던 곳의 집 주인이었던 오도전은 우암에게 수학하여 향교의 훈장이 되었고 서유원 역시 끝까지 그의 문하에 출입하여 훈도를 받았다. 우암이 장기를 떠난 후 29년 되는 해 장기에 살고 있던 오도종, 이석증, 황보헌, 이동철, 한시유 등이 죽림서원을 창건하여 배향했다. 장기인들은 우암을 통하여 유학의 진수를 접하고, 궁벽한 해곡(海曲)이 예절을 숭상하는 유향(儒鄕)이 되었다는 평을 한다.

그로부터 약 150년 뒤인 1801년 다산 정약용이 이곳에 유배되어왔다. 이해 벌어진, 노론 벽파가 남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음모 및 천주교 신봉자 처단 구실로 일으킨 신유사옥 때 연루, 모진 고문 끝에 유배된 것이다. 한양에서 10여 일을 걸어서 가는 860리길. 영남대로. 한양에서 안성을 지나 충주와 문경을 거쳐 상주~의흥~신령~영천으로 해서 경주관아에서 점고를 받고 진달래가 핀 음력 3월9일에 이곳 장기 고을 마현에 이르렀다. 다산은 마현리 성선봉(成善封)의 집에서 7개월간 갇힌 생활을 했다. 그러다 사위인 황사영이 작성한 백서사건이 발생하면서 관련의혹으로 그해 10월20일에 서울로 다시 압송되었다가 강진으로 유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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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장기 고을 사람들의 삶과 고을 관리들의 목민 형태를 ‘부옹정가’ ‘기성잡시 27수’ ‘오적어행’ ‘아가사’ ‘해랑행’등 120여 편의 시로 남기는데, 대표적인 것이 당대 농민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장기 농가 10장’이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이들 시는 토속적이고도 사실적이며 비판적이면서도 은유적이다. 그밖에도 ‘이이술’ ‘기해방례변’ 등의 서책도 저술했으나 의금부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유실되었다고 한다. 다산의 시 ‘장기의 귀양살이에서 풍속’ 중의 한 시는 그의 고통의 한 순간을 떠올리고 있다.

습한 데서 봄을 나니 마비증세가 일어나고
북녘에서 길들인 입맛 남녘 음식이 맞지 않네
비방인 창출술이나 담그려는데
아이머슴 괭이 메고 가며 고향이 어디냐고 묻네

#2. 조선시대 주요 유배문화의 현장

우암이 머물렀던 마산촌의 집과 다산이 머물렀던 마현리의 집은 지금의 장기초등학교 근방으로 짐작된다. 장기읍성 아래의 장기초등 교정에는 우암 송시열이 심었다는 은행 고목이 서 있다. 그 옆에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의 사적비가 나란히 서있다. 그들을 기리는 이 지역민들의 애틋한 마음을 보여주는 증표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은 가끔 장기읍성의 동문에 올라 일출의 장엄한 광경을 바라보았다고 전해진다.

장기면은 동해안의 오지다. 뒤로는 산들로 첩첩 막혀있고, 앞으로는 바다로 둘러싸였다. 그래서 예부터 유배지로 많이 이용됐다. 조선시대의 형벌제도로 유배형이 실시되고, 세종 때 배소상정법이 정비됨에 따라 장기는 한양에서 유 3천리의 빈해각관(濱海各官:서울에서 30개 역 밖에 있는 바닷가 고을) 지역에 해당되어 유배지로 자주 활용됐다. 영조 때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흑산도와 같은 험한 곳이나 무인도에는 유배를 금지시켰기에 영조 이후 장기로 유배 온 사람이 많아졌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이 지역으로 유배된 이는 100명이 넘는다. 실록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장기로 유배된 자는 60여명이지만, 지역 사학자들의 조사에 의하면 무려 117명에 이른다. 조선 태조 1년 설장수를 시작으로 홍여방, 양희지, 김수흥 등 수많은 사대부가 장기를 거쳐 갔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로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이 꼽힌다.

이들 유배 죄인 중에는 여성도 꽤 있어서 눈길을 끈다. 19명이나 되는 걸로 알려진다. 그 중 점례라는 여인은 순조 1년(1812) 7월 이곳에 유배되었는데, 적에게 항복한 첨사 김인후의 첩이었다. 정조 4년(1787)에는 유한경의 어미 계우가 이곳에 안치됐고, 정조 1년(1777)에는 좌포도대장 삼도수군통제사 홍상범의 처 희순이 역적 연좌로 유배되기도 했다.

이런 외지고 버려진 형벌의 땅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도리어 이곳을 새롭게 변모시키는 계기가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름난 학자들의 유배로 인해 곳곳에 후학을 가르치는 서원들이 들어서고, 학문을 전수하는 유교적 학풍이 조성되면서 차츰 선비마을로 변모되어간 것이다.

우암의 유배 생활 동안에는 전국의 많은 선비들이 장기를 드나들었다. 노론 소론 분당의 계기가 된 곳도 장기라고 알려져 있다. 우암이 장기를 떠난 이후 제자들은 죽림서원을 세워 학문에 정진했다. 우암과 다산 외에도 수많은 선비들이 장기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그들로 인해 장기의 서원에서는 학문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이를 통해 중앙정계로 이어지는 인재들이 잇따랐다. 무엇보다 학문을 숭상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조선시대 장기에 세워졌던 서원은 무려 12개에 이른다. 동해안 마을 중에서도 가장 많은 서원이 있었던 셈이다. 유배문화가 피운 꽃들이 아닐 수 없다.

#3. 유배문화 체험촌 조성 마무리

장기유배문화체험촌은 수년간 포항시 남구 장기면 주민들의 숙원사업이었다.

장기면은 제주도와 전남 강진, 경남 남해 등과 함께 조선시대 주요 유배지였던 만큼, 유배 문화의 기운을 오롯이 느낄 수 있음에 착안하여 기획된 것이다. 지역의 특성으로 유배 문화를 떠올리면서, 특히 송시열과 정약용의 유배생활과 그 영향을 기리고, 아울러 많은 유배인이 남긴 시문들을 통해 유배지의 정서를 체험케 하는 가운데, 장기읍성 등의 문화재와 자연경관을 연계하여 관광자원화하려는 의욕으로 조성되고 있다.

그동안 부지 확보 문제로 표류했으나, 2016년 사유지 6천258㎡에 대한 토지보상 협의를 완료하고 이해 11월 첫 삽을 떴다. 장기면 서촌리 285 일원에 총 면적 1만377㎡와 탐방로 4㎞, 시비 38억원을 들여 추진하는 이 사업은 현재 부지 조성과 소하천 복원 등 하천공사 작업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 시설은 관리 사무소, 오도전의 안채 집, 망향정 등 기와집 3동과 우암의 적거지와 다산의 적거지 등 초가집 6동이 조성됐다. 이야기의 벽을 통해 우암과 다산의 이곳 삶을 떠올리고, 아울러 이곳에 유배되었던 105인의 기록과 유배과정 등을 소개했다. 함거와 곤장, 가, 그네, 널뛰기, 투호 등 체험시설도 갖추어졌다. 조만간 조성이 완료될 계획이다.

포항시는 이 체험촌이 이곳을 거쳐간 우암 송시열, 다산 정약용 등의 삶과 연계하면서 조명하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유배문화’라는 특이한 관광체험이 활성화되는 거점으로 거듭날 것을 기대하고 있다.

글=이하석(시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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