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영남일보로 보는 인물열전' .7] 이상호

  • 김기오
  • |
  • 입력 2018-07-05   |  발행일 2018-07-05 제29면   |  수정 2019-01-14
‘태극단’ 조직 항일 독립투쟁 벌인 ‘혁명소년’
日 경찰에 적발돼 형무소 수감
모진 고문에 몸 망가진 후 석방
광복되던 해에 약관의 생 마감
20180705
대구상업학교 재학 중 항일투쟁조직인 태극단을 만들었던 이상호는 병석에서 신음하다가 광복 넉 달 뒤인 12월에 생을 마감했다. <영남일보 1945년 12월12일자>
20180705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가련한 일본제국교육의 질곡 아래 이십 세 미만의 홍안소년으로서 조국광영의 이상을 실천하고자 굳센 투쟁력을 결심하여 대구상업학교 생도들을 중심으로 한 독립 태극단으로서 결사적 투쟁을 전개하다가 마침내 사전에 계획이 탄로되어~.’

광복 넉 달 뒤 1945년 12월12일자 영남일보는 항일투쟁을 벌인 홍안소년의 이야기를 되짚고 있다. 기사 속 소년은 대구상업학교 학생이다. ‘태극단’을 만들어 독립투쟁을 벌이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전에 발각된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미 지난 몇 년 전의 일을 왜 광복 이후에 보도하고 있을까.

1940년대로 접어들자 일본은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를 더욱 옥죄기 시작했다. 중국과의 전쟁이 수년째 이어지고 태평양 전쟁도 금방 끝낼 수 있는 상황을 넘기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조선 식민지를 향한 일본의 착취는 갈수록 심해졌다. 청년과 소년들이 무차별적으로 징집되어 전쟁터로 내몰렸다. 뿐만이 아니다. 소녀들도 정신대나 위안부라는 명분으로 끌려가 평생 씻지 못할 수모를 당해야 했다. 이 같은 일제의 만행에 행동으로 맞서려는 학생들이 있었다.

1942년 5월, 당시 대구공립상업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학생 몇몇이 모였다. 이들은 항일 투쟁을 벌일 비밀결사 조직을 만들자는데 쉽게 의기투합했다. 태극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독립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실천하기로 했다. 태극단으로 이름을 지은 것은 대한제국 이후 사용돼온 태극기를 상징해 붙였다.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최고의결기관으로 간부회의를 만들었다. 조직을 꾸려나가는데 필요한 재정문제는 각자가 돈을 내기로 했다.

태극단은 내실을 다지는 동시에 단세를 키우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듬해에는 조직 안에 체육국을 비롯해 과학국·관방국 등을 두었다. 이들 조직을 활용해 민족의식을 높이고 학술연구나 체력향상 등을 꾀하였다. 또 건아대를 두고 중학교 1·2학년생과 초등학교 상급생들을 대원으로 가입시켰다. 이는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항일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전국적인 조직을 만들기 위한 기초공사였다. 그러나 태극단은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기 전에 일본 경찰에 적발되고 말았다. 1943년 5월23일이다. 태극단의 최고 핵심인물이 대구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붙잡힌 것이다. 그가 바로 이상호다. 이상호의 체포는 필연적으로 태극단의 와해를 가져왔다. 이상호가 잡히자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한 서상교·김상길 등도 구속됐다. 태극단 사건으로 체포된 인원만 40명에 이를 정도로 일본경찰은 무지막지하게 수사를 벌였다.

이상호는 1944년 대구지방법원으로부터 단기 5년 장기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선고 직후 김천 소년형무소에 수감됐다. 수사과정과 수감 후 일본경찰의 혹독한 고문은 그의 몸을 망가뜨렸다. 늑막염 등의 병까지 겹쳐 수형생활이 불가능해지자 일본경찰은 보석으로 풀어줬다. 광복 전이었다. 하지만 고문후유증까지 겹친 그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병석의 신음 아래 건국약진의 모습을 병석에서 학수하던 이상호군은 동지와 친척이 지켜보는 아래 지난 9일 혁명의 생을 통한 막을 지웠다. 그 눈물겨운 고별식은 11일 오후 2시부터 덕산정 반월당 도로 앞에서 동지·친족·사회 각 단체대표자들의 참석 아래 엄숙히 거행되었다.’ (영남일보 1945년 12월12일자)

그는 광복된 세상을 병석에서 맞았다. 그리고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때가 1945년 12월9일이었다. 영남일보가 홍안소년 이상호의 항일투쟁 기사를 되짚어 실은 까닭이다. 혁명소년 이상호는 광복의 기쁨을 온전히 누려보지 못한 채 약관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어른들이 두고두고 갚아야 할 빚을 남기고서. 한편 거사를 함께했던 서상교·김상길은 각각 지난 3월과 4월 별세했다.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