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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숙의 실과 바늘 이야기] 한반도 무궁화 꽃수·천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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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수영기자
  • 2018-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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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들의 무궁화수, 애국지사 가슴속 뜨겁게 적시다

1860년대 만들어진 무궁화 꽃수.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한반도 무궁화 지도수. 남궁억 선생의 본을 가지고 수를 놓은 것이다.
무궁화 지도수.
도로는 종일 받은 열기로 뜨겁다. 바람도 지쳤는지 쉬고 있는 듯 고요한 오후, 하지만 그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훤칠한 키를 자랑하며 무궁화 꽃이 일렁이고 있다. 고요한 공기를 흔들어 깨우는 듯한 모습에 갑자기 눈은 생기를 얻는다. 그 모습이 옛날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투사들의 손과 무궁화 꽃수를 놓던 소녀들의 손과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다. 시골길을 가다 보면 어김없이 한 그루씩 낮은 황토담을 배경으로 서있던 무궁화 꽃이 그저 피어 있는 꽃이 아니라 민족정신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피운 꽃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그 꽃을 바라보는 마음이 애틋해졌다.

베갯모 자수의 주제는 모란과 연꽃, 국화 순으로 많이 나타나는데 단독의 독립된 수로는 ‘한반도 무궁화 꽃수’가 가장 많이 남아있을 것이다. 같은 본(本)이지만 솜씨만 다른 한반도 무궁화 자수들이 쉽게 발견된다.

한말 독립운동가 남궁억 선생
무궁화 묘목·한반도 무궁화꽃수 보급
배화학교 등 전국 여학교·여인에 확대
독립운동가 있는 간도로 자수 보내져
日 경찰에 발각, 고문·옥고로 세상떠나

여학생들에 유행한 천인침
여인 천명이 한땀씩 수놓은 ‘무운장구’
정성다해 총알 비켜가기 바라는 마음
강제징용 합리화·연대감…일제 계략


한반도 무궁화 꽃수를 고안하고 보급한 사람은 남궁억 선생(한말의 독립운동가, 교육가 1863~1939년)이다. 그는 일제의 무궁화 말살정책에 대항해 무궁화 묘목을 보급하고 한반도 무궁화 꽃수의 자수 도안을 직접 만들어 여학생들에게 보급했다. 이렇게 수놓아진 자수는 독립운동가들이 있는 간도로 보내졌으며, 태극기와 함께 그들의 가슴에 소중하게 품어졌다. 무궁화를 수놓으며, 여학생들은 암울함 속에서도 독립의 열망을 잃지 않았으며, 무궁화 수를 받은 애국지사들의 가슴은 더욱 단단한 연대로 이어졌을 것이다.

남궁억 선생이 만든 무궁화꽃 13송이는 배화학교뿐 아니라 전국 각지의 여학교와 여인들에게 확대되어 민족의식을 심은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수를 놓는 상황이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민족정신의 상징인 무궁화를 말살하려고 하는 일제의 정책과 대치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무궁화 5잎이 슬쩍 4잎으로 바뀌기도 하는데 그것은 무궁화 꽃이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처럼 혹독한 감시하에 사라져가는 무궁화 꽃을 보급하기 위해서는 전략이 필요했는데 남궁억 선생은 강원도 홍천의 보리울 학교에 수만 그루의 묘목을 심는다. 그리고 뽕나무 묘목 주문이 들어오면 무궁화를 끼워 주어서 전국에 무궁화 번식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1933년 11월2일 결국 7만주가 넘는 무궁화 묘목이 잡지사원을 가장한 일본 경찰에 의해 발각되어 보리울 학교까지 폐쇄되는 무궁화동산 사건이 발생한다. 결국 남궁억 선생은 1년 복역에 3년 집행 유예로 판결을 받았고, 고문과 옥고(獄苦)로 신음하다 1939년 4월에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갖은 회유에도 그는 이런 명언을 남긴다.

“내 나이 칠십이고 다 산 몸이 전환을 한다는 것은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니, 어서 법대로 할 것을 바라는 것뿐이오. 나는 죽더라도 조선 사람으로 죽겠소.”

이 참화가 아니었다면 암울한 시기에 청년들에게 독립의 희망을 품고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일러주었던 참된 스승이 광복된 나라를 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절로 안타까움이 든다. 특히 남궁억 선생이 1931년에 만든 ‘무궁화 동산’이란 노래를 읊조리다 보면 마음 한구석에서 선생에 대한 흠모의 정이 차오른다.

“우리의 웃음은 따뜻한 봄바람 춘풍을 만난 무궁화 동산/ 우리의 눈물이 떨어질 때마다 또다시 소생하는 우리 이천만 빛나거라/ 삼천리 무궁화 동산 잘살아라/ 이천만의 고려족”

이처럼 무궁화 자수가 남궁억 선생의 도안 아래 여학생들을 통해 확산된 시점에 또 하나의 바느질이 유행하였는데 그것이 천인침(天人針)이다.

천인침은 일본에서 중일전쟁 때부터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유행한 것으로 황군 병사들의 무사를 빌기 위해 천 명의 여자가 흰색의 무명천에 붉은 실로 한 땀씩 매듭을 놓아서 만든 것인데 이것을 지니고 출정하면 이들의 정성으로 무사히 적지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공립여자고등학교의 애국자녀단을 중심으로 천인침을 만들었던 기록이 보인다.

지난 15일 개관한 대구교육박물관(관장 김정학)에서 펴낸 ‘여학생 일기’는 1930년대 말 대구의 여학교의 수업과 당시의 사회풍경이 여학생의 눈으로 소상하게 그려져 있는 귀중한 자료인데 이 책에도 천인침에 참여한 활동에 대해 나와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나이에 해당하는 대구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때 쓴 일기(1937년 2월18일부터 12월12일까지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정오에 곧바로 동운정의 언니 집에 가서 천인침을 놓고 그 후에 친구 집에 가서야 6시에 환송에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같이 역에 갔습니다.”(1937년 7월30일)

김길태옹(91·산부인과 의사)에 의하면 마산의 경남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제2차 세계대전(1939~45)이 일어났고 여기에서도 천인침 만들기에 많은 여학생이 동원됐다.

“우리는 학교 수업 중 군복의 단추 달기, 허리띠 만들기를 하고 심지어 방직공장에 차출돼 솜으로 만든 실을 뭉치는 작업도 했다. 흰 천에 한 사람 한 사람이 한 바늘 한 바늘 매듭을 지어 정성껏 수놓아 센닌바리(1천명이 만드는 허리띠)라는 허리띠를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깊이 있게 들여다본 김영희씨(63)는 1999년에 발간한 장편소설 ‘센닌바리’(도서출판 경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즉 ‘무운장구(武運長久)’라는 글자를 한 땀씩 수놓은 천인침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정성 들인 수를 놓아 총알을 비켜가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지만 그것을 통해 여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강제징용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징용에 반발하던 남자들도 여인의 정성이 담긴 수건을 쓰는 순간 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합리화와 연대감을 교묘하게 포장한 일제의 계략이라는 것이다. 전쟁의 역사 속에서도 무궁화 수가 수놓아졌고, 천인침이 만들어졌다. 여전히 그 둘의 속성은 소생과 치유, 희망의 메시지를 관통하고 있다. 무궁화 꽃수를 숨어서 놓지 않아도 되는 목마르지 않은 시간이다. 하지만 흔들리는 무궁화 꽃을 바라보면서 여전히 목마른 이것은 무엇일까?

박물관수 관장
사진=박물관 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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