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 토크] ‘허스토리’ 김희애, 관부재판 원고단장 문정숙 열연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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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7-06   |  발행일 2018-07-06 제43면   |  수정 2018-07-06
“위안부 할머니 외로운 투쟁 그린 실화…발연기 할까봐 많이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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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버서. 내 혼자 잘 먹고 잘 산 게.” 부산의 한 여행사를 책임진 문정숙은 “할머니들의 재판에 왜 이리 매달리느냐”는 친구 신 사장(김선영)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이 살아가던 정숙은 우연히 가사 도우미로 일하던 배정길(김해숙)의 아픈 과거를 알게 되고, 이를 계기로 사비를 털어가며 주도적으로 관부 재판에 뛰어들었다. 아무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지만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간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며 일본 정부를 상대로 법정 투쟁을 벌였다. 목표는 하나다. “이겨야죠. 이겨야 할매들 분이 풀리죠.”

김희애가 관부재판 원고단의 단장 문정숙을 열연했다. 반듯하고 올곧은 기존 이미지에 더해 당당함과 열정이 돋보이는 문정숙 캐릭터는 누구보다 김희애를 위해 재단된 맞춤옷 같다. 하지만 소재가 주는 무게감 때문인지 “내 연기인생에 큰 도전이었다”며 “이런 소중한 영화에서 ‘발연기’를 하면 어쩌나 정말 많이 떨었다”고 털어놨다. 데뷔 35년 차 베테랑 배우에게서 쉽게 들을 수 없는 말이다. ‘허스토리’는 위안부 할머니와 그들을 조력해왔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서사적 뼈대만 보자면 문정숙의 성장담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영화는 나 몰라라 하고 있는 한국정부와 수치스러운 역사를 묻어두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 속에 외로운 투쟁을 벌였던 문정숙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김희애가 많은 부담을 느끼면서도 문정숙 캐릭터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이유다.

관부재판 원고단장 문정숙 열연

부산∼日 시모노세키 오가며 기나긴 법정투쟁
소재가 주는 무게감…내 연기인생에 큰 도전
그분들의 용기있고 의미있는 행동 관객에 전달
진심다해 연기하는 것이 조금이나마 위안될 것|

극우 시위속 실제재판 승소…역사적 진실 통해
촬영장에서 막내…선배들 많아 잊지 못할 경험
부산사투리 매일 연습, 日語 외우기도 어려움


목소리·머리 등 나와 다른 이미지 변신 만족감
나문희·김해숙 선생님 왕성한 활동 보며 용기
후배들에 희망 주는 현역으로 오래 남고 싶어


▶‘허스토리’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위안부 여성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많은 의미를 함축한 작품이다.

“그래서 중압감이 엄청났다. 처음에는 솔직히 어떤 큰 뜻이나 사명감보다는 할머니들 얘기라 일부러라도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공식 사과와 손해배상을 얻어내기 위해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며 기나긴 법정 투쟁을 벌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를 생각했다. 결국은 진심을 다해 연기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할머니들에 비하면 티끌만 한 일이겠지만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고 그분들의 용기 있고 의미 있는 행동과 노력을 조금이라도 알고 감동을 받는다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것 같았다.”

▶어느 때보다 역할에 대한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두 팔 걷고 할머니들과 일본으로 재판을 하러 다녔다는 건 많은 것을 포기해야 가능하다. 그(문정숙)를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접근이 쉽지 않았을 텐데.

“기적처럼 대단한 일을 하셨지만 그분이 우리와 다른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나는 좋은 일을 할 거야’ ‘할머니들을 위해 전 재산을 바칠 거야’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극 중 기생장사를 했다는 오해를 받은 것처럼 힘든 일도 많이 겪으신 걸로 알고 있다. 그런 점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연기적 접근도 오히려 편했다. 연기를 하는 내내 이처럼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낀 건 처음이다.”

▶문정숙은 현재 ‘한국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회장을 맡고 계신 김문숙 선생님을 모델로 했다. 실제로 만난 적은 있나.

“기록과 사진을 통해서만 뵀다. 극 중 문정숙은 50대인데, 선생님은 당시 60대였다. 현재 93세인데, 지금도 정신대 관련 일을 계속 하고 계시다니 정말 대단한 분이다. 만나게 된다면 실제 어떻게 일을 하셨는지 듣고 싶다. 또 영화를 보셨다고 들었는데 어떠했는지도 조심스럽게 여쭤보고 싶다.”

▶관부재판이 일어난 곳은 일본에서도 보수주의 색채가 강한 시모노세키다.

“지역색이 강하고 일본 내에서도 극우 세력이 센 곳이라고 하더라. 실제 재판 진행과정에서 영화에서처럼 욕설과 반대 시위를 수차례 경험했음에도 그곳에서 승소를 받아냈다는 건 할머니들의 진심과 역사적 진실이 통한 거라고 본다. 시나리오를 읽고 좋았던 점도 충분히 신파로 흐를 수 있었을 텐데 오버하지 않고 절제했다는 점이다. ‘허스토리’는 여성이 중심이 되는 영화지만 이처럼 인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영화에는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이 등장한다. 촬영장 분위기도 좀 달랐을 것 같다.

“특별했다. 요즘에는 촬영장에 가면 대부분 내가 선배인데, 이번에는 극 중 딸과 함께할 때를 제외하고는 내가 거의 막내였다. 많은 선배님과 함께한 현장이라 특히나 잊지 못할 경험이 된 것 같다. 앞으로 이런 현장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싶고, 계속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부산 사투리와 일본어가 차지더라. 어떻게 준비했나.

“괜찮았나? 요즘은 지역 사투리를 프로페셔널하게 구사하는 연기자들이 워낙 많다 보니 잘해야 기본이다. 나도 그동안의 커리어가 있는데 이건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발연기가 되겠더라. 부산 사투리 선생님과 거의 매일 만나서 연습했고, 내가 잠깐 미국에 갔을 때에도 아침 점심 저녁으로 통화했다. 그 과정에서 선생님의 이모님, 이모님의 친구분들, 선생님의 친구들과도 통화를 했다. 일어는 더욱 고통스러웠다. 뜻을 모르니 일어 단어 하나하나 한글로 써서 읽고 외웠다. ‘관부재판을 아십니까?’ 이 한 줄 외우는 데만 일주일 이상 걸렸다. 기본적으로 뭘 알아야 할 텐데 전혀 모르니 안 외워졌다. 그래도 줄기차게 외웠다.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작년에 외운 대사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우아함과 함께 단아함, 반듯함은 당신을 대표하는 이미지다. 그런 점에서 문정숙 캐릭터와 부합되는 점도 많은 것 같다.

“감사하고 쑥스러울 따름이다. 그런 수식어는 여배우에게 어마어마한 재산인데 실제로는 내가 정반대다. 민규동 감독님 역시 문정숙 캐릭터를 통해 기존의 내 이미지를 바꾸고 싶으셨던 것 같다. 일단 내 목소리가 작고, 말 끝에 ‘ㅇ’(이응) 표현이 많다며 이를 고쳤으면 좋겠다고 했다. 목소리를 녹음해서 들어보니 정말 그랬다. 부산 사투리도 해야 하는데 걱정이 됐다. 외형적인 변화도 원하셔서 머리도 단발로 자르고, 안경도 끼고, 체중도 5㎏ 정도 불렸다. 솔직히 나도 모든 것을 바꾸고 싶었던 참이라 잘됐다 싶었다.”

▶요즘 여배우들의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 드라마에 비해 영화는 더욱 심한 편인데 당신의 경우는 어떤가.

“나라고 별수 있겠나.(웃음) 연년생 아들 둘을 키우면서 7년 만에 영화 한 편(우아한 거짓말) 했다. 그동안 영화 쪽에선 제의가 오지 않았고 나 역시 드라마 때문에 바쁘긴 했지만 그래도 텀이 길긴 했다. 그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추세인 것 같다. 남성물 중심의 영화에 관객이 많이 드는데 굳이 여배우를 위한 영화를 만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영원한 건 없다. 언젠가는 상황이 역전돼 여배우가 주류가 되고 남자 배우가 할 게 없다는 말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동안 관리를 잘해온 것 같다.

“배우는 늘 스탠바이 상태가 돼 있어야 한다. 언제, 어떤 작품이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 변화를 줄 수 있는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솔직히 나는 작품에 출연할 때마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임해왔다. 동료나 후배들은 내가 그런 말 한 지 10년이 넘었다고 하지만.(웃음) 아무튼 그동안 운이 좋게 좋은 역할들을 만났다. 그래서 세상일은 모르는 거다. 앞으로도 어떤 선물(작품)이 나에게 올지 모르니 꾸준히 운동을 하면서 체력관리에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런 노력 덕에 여전히 대중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늘 감사하다. 솔직히 예전에는 내 나이 때가 되면 여배우는 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자격지심이랄까. 주류에서 밀려났으니 왠지 한쪽으로 비켜나야 할 것도 같고. 하지만 생각을 바꿨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공과 연륜이 쌓이는 건데, 단지 나이가 많다고, 여자라는 이유로 활동 범위가 제한적인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우리가 죽은 시체들도 아니고. 나문희, 김해숙 선배님들은 지금도 누구보다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시고 좀 더 적극적으로 임하셔도 가능하다는 걸 이미 증명했다. 그분들을 보면서 나도 위축되지 말고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선배님들과 함께한 이번 작업이 그래서 축복이고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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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작은 뭔가.

“좋은 작품을 기다리고 있다. 내 맘에 쏙 드는 것을 기다리면 10년 후에 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한 문장이라도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생각이다. 이제 아무거나 못 하겠다. 우선 내가 공감해야 다른 사람을 설득시킬 수 있다. 아무것도 보여줄 게 없는데 있다고 말하는 건 대중을 기만하는 거다.”

▶‘허스토리’를 계기로 스크린을 통해서도 다양한 활동을 펼치길 기대하겠다.

“그러고 싶은데 선택을 받는 입장이다 보니 뜻대로 안 된다. 하지만 내가 나문희 선생님에게 자극을 받고 희망을 발견했듯 미약하나마 나를 통해서도 그런 희망을 후배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오랫동안 현역으로 일하고 싶다.”

글=윤용섭기자 hhhhama21@nate.com

사진제공=YG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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