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의 고장 청송 .8] 충효의 상징 조준도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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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7-18   |  발행일 2018-07-18 제13면   |  수정 2018-07-18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리워…묘소가 보이는 벼랑에 ‘정자’ 지어
[인재의 고장 청송 .8] 충효의 상징 조준도
조준도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모친의 묘소가 바라보이는 곳에 지은 방호정.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 신성계곡 초입에 자리하고 있으며 깊고 높은 단애의 가장자리에 섬처럼 앉아 있다.
[인재의 고장 청송 .8] 충효의 상징 조준도
방호정 옆에는 ‘방호조선생향사유허비(方壺趙先生享社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1863년 유림과 종중에서 방호정 곁에 묘우를 세우고 조준도를 제향했지만 고종 때 묘우는 훼철되고 지금은 유허비만 서있다.
[인재의 고장 청송 .8] 충효의 상징 조준도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 계곡 초입인 속골에 있는 금대정사. 망운 조지와 그의 아들 조수도, 조동도, 손자 조함도를 위한 재실로 1736년에 건립됐다.
[인재의 고장 청송 .8] 충효의 상징 조준도
금대정사 왼쪽에는 조준도의 동생 조동도가 지은 지악정이 자리한다.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로 1962년에 확장 중수했다.

바다 가운데 있는 신선이 산다는 산, 방호(方壺). 열자(列子)의 탕문(湯問)에는 ‘발해의 동쪽에 큰 골짜기가 있는데 바닥이 없는 그곳을 귀허(歸墟)라 부른다. 그 가운데 다섯 산이 있는데 그 셋째를 ‘방호’라 했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신선과 성인의 무리’라 했다. 청송 안덕의 신성(薪城) 골에 방호가 있다. 바닥 깊은 큰 골짜기, 신선이 살 만한 아름다운 곳이다. 6세에 어머니를 떠나야 했던 어린 소년 조준도(趙遵道)는 불혹이 넘어 돌아와 그 골짜기에 어머니를 묻었다. 그리고 묘소가 아득히 바라다보이는 자리에 정자를 짓고 스스로 ‘방호’라 했다. 돌아가 앉은 단애의 가장자리, 그곳은 또한 그리움의 귀허였다.


#1. 어릴 때부터 비범했던 조준도

함안조씨 망운(望雲) 조지(趙址)는 생육신 어계(漁溪) 조려(趙旅)의 후손으로 스무 살 무렵인 1562년 청송 안덕으로 들어왔다. 그는 안동권씨(安東權氏) 권회(權恢)의 딸과 혼인해 8남매를 두었는데 그중 세 딸은 신지제(申之悌), 장후완(蔣後琬), 이종가(李從可)에게 출가했다. 장자인 수도(守道)는 순수하고 학문이 높았던 인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문을 피란시킨 후 28세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둘째 형도(亨道)는 어릴 때 백부의 양자가 되었고 커서는 임진왜란에 출정해 많은 공을 세웠다. 셋째 순도(順道)는 평생 부모를 모시며 효로써 충을 행하며 살았다. 다섯째 동도(東道)는 15세 때 형 형도와 함께 전장으로 나갔다.

망운 조지의 넷째아들이 조준도다. 자는 경행(景行), 호는 방호(方壺)다. 그는 1576년 2월24일 청송 안덕리에서 태어나 6세 때 재종숙부인 사직공(司直公) 조개(趙介)에게 입양됐다. 조준도는 8세 때 처음으로 글을 배우며 ‘효경(孝經)’과 ‘소학(小學)’ 등을 읽었는데 가르침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해독하고 깨달았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지덕(智德)이 뛰어났던 그는 사직공이 매우 기이하게 여길 만큼 재능이 비범했다고 전한다. 10세 때에는 큰형 조수도(趙守道)를 따라 유일재(惟一齊) 김언기(金彦璣)에게 수학하며 퇴계학을 계승하게 된다. 김언기의 70여 문하생 가운데 조준도는 가장 어렸지만 스승은 그의 의젓함과 총명함을 특별히 아꼈고 그의 재주와 기량을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조준도가 13세 되던 해 양아버지인 사직공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성인과 마찬가지로 상을 치렀다고 전한다.

조준도는 학봉 김성일의 가르침을 여러 차례 받기도 하고 도산에 가서 직접 공부하기도 했다. 20세 때는 예안(禮安)에 부임한 자형(兄) 신지제를 따라가 퇴계학을 이어받은 사우들과 어울리며 3년간 학문을 강론하기도 했다. 29세 때는 한강 정구에게 학문을 배웠다. 49세에는 장현광을 찾아가 예설(禮說)과 도설(圖說)에 대해 강론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항상 어진 스승을 따르고 착한 벗을 취하는 일에 먼저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형 조형도가 고향에 올 때마다 항상 주위에서 받들고 보좌하며 책상을 나란히 하여 함께 공부했다고 한다. 그에게 그것은 모든 근심을 잊게 하는 즐거움이었다고 한다.

#2.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지은 방호정

조준도가 17세였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형 형도와 동생 동도가 창의해 나아갈 때 그는 늙고 병든 어머니를 모셔야 했다. 그는 형제들에게 ‘남아의 사업이 어찌 헛될 것인가/ 괴수 수길(秀吉)의 목을 베고/ 능연각 위에 내건 후에/ 창주(滄州)로 돌아와 낚싯대를 드리우리라’며 격려했다. 전쟁 발발 이듬해인 1593년 큰형 조수도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전쟁 종결 이듬해인 1599년 친아버지인 조지가 세상을 떠났다. 남은 네 형제의 우애는 매우 각별했다.

조준도는 특히 형 조형도와 창석(蒼石) 이준(李埈), 풍애(風崖) 권익(權翊), 하음(河陰) 신집(申楫) 등과 자주 어울렸다. 이들은 함께 모여 학문을 강론하고 시정(詩情)을 나누었는데, 주 근거지가 바로 방대(方臺)였다. 신집(申楫)의 기록에 의하면 방호의 속칭이 방대다. 학봉 김성일이 ‘옥돌 갈아 세운 절벽 천첩으로 쌓였는데/ 수정같이 맑은 물은 몇 굽이로 흐르고/ 구름 속에 달을 보고 울타리에 개 짖고/ 은빛날개 갈매기는 백사장에서 졸고 있네’라고 한 곳이다. 이들 다섯은 각자 신선의 이름을 짓고 골짜기 이름을 ‘오선동(五仙洞)’이라 하였는데 조준도는 스스로 ‘송학서하(松鶴棲霞)’라 했다.

1610년 친어머니 안동권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아들들이 자주 노니는 방대 골짜기의 산에 묻혔다. 조준도는 1617년 어머니의 묘소가 보이는 방대의 벼랑 위 땅을 사들였고, 1619년 정자를 지어 ‘풍수당(風樹堂)’이라 했다. 그는 ‘정자를 지은 건 어머니 묘소를 보기 위한 것/ 부모님 여읜 이 몸 벌써 쉰 살이라네’라 노래했다. ‘사친당(思親堂)’이라고도 불렸던 정자는 이제 조준도의 호를 따 ‘방호정(方壺亭)’이라 불린다. 방호정은 안동과 청송을 경계 짓는 연점산(鉛店山)의 동쪽 신성계곡 초입에 자리한다. 1억년 전부터 천천히 형성되어온 계곡은 깊고 넓고 길고 가파르고 높다. 그 바닥이 없을 것 같은 단애의 가장자리에 방호정은 섬처럼, 바위처럼 앉아 있다.

#3. 병자호란 이후 방호에 살다

1627년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조준도는 여헌 장현광과 우복 정경세에 의해 의병장으로 발탁돼 전장에 나섰다. 그는 동지를 규합하고 통문을 띄워 군량미를 모으고 사재를 털어 군수물자를 마련했다. 그러나 그해 3월 강화가 성립되면서 의병은 자진 해산하게 된다. 그는 효행으로 선무랑(宣武郞)의 품계를 받았고 행의(行義)로 천거되어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가 됐다. 이어 조산대부(朝散大夫)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봉정대부(奉正大夫), 중훈대부(中訓大夫)로 승진했다. 그리고 1631년 중직대부(中直大夫)로 한 차례 더 승진했으나 벼슬을 버리고 청송으로 돌아왔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한양이 함락되었고 임금은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다. 조준도는 문경으로 군량미를 보내고 달려가 창의를 논의했다. 그러는 사이 임금이 남한산성을 내려와 굴욕의 강화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북쪽을 향하여 대성통곡했다. 그리고 곧 형 조형도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조준도는 대둔산에 들어가 자취를 감추고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 훗날 누군가 간혹 그때의 일을 말하면 그는 문득문득 눈물을 흘리며 손을 저어 말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는 더이상 벼슬자리에 나가지 않았다. 단지 방호정에 파묻혀 학자들과 강론하기를 즐겼다. 궁핍한 사람이 있으면 창고를 열어 넉넉히 도와주었고 노복과 가축까지 나누어 주었다. 현종 5년인 1664년에 조준도는 89세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왕에게 아뢰었다. ‘청송(靑松)에 사는 전(前) 주부(主簿) 조준도는 89세인데 그의 자제들이 소를 올리려고 했지만 그가 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당시에는 90세 이상의 백성에게 은전으로 벼슬을 내렸는데 그가 이를 고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에 조준도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곧이어 부호군(副護軍)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그는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청송읍 대곡(大谷)에 묻혔다. 1863년 유림과 종중에서 방호정 곁에 묘우를 세우고 제향했으나 고종 때 훼철되었고 지금 방호정 옆에는 ‘방호조선생향사유허비(方壺趙先生享社遺墟碑)’만 우뚝 서있다. 조준도는 국란의 긴 시대를 통째로 겪으면서도 장수했다. 그가 돌아간 곳이 방호였고, 그 자신이 또한 방호였으니….

긴 시간이 흐른 1914년, 방호정에서 ‘장릉사보(莊陵史補)’가 목판본으로 정식 간행됐다. 장릉사보는 1796년 정조가 단종의 사적을 모아 편찬했지만 간행되지 못한 것이었다. 세상에 있고, 세상에 없는, 많은 이들이 기뻐했을 것이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자문=김익환 청송문화원 사무국장

▨참고문헌=청송군지. 청송누정록. 청송향토사연구소 홈페이지. 한국학중앙연구원 홈페이지. 허권수, 동계 조형도의 생애와 그 시대, 2015. 최은주, 동계 조형도의 문학교류와 인맥네트워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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