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영남일보로 보는 인물열전’ .8] 박중양

  • 박진관
  • |
  • 입력 2018-07-19   |  발행일 2018-07-19 제29면   |  수정 2019-01-14
일본인과 짜고 대구읍성 파괴한 ‘친일파’군수
협성학교 폐교·경제 침탈 등
동포 핍박하며 日 앞잡이 노릇
당시 이토히로부미 양자로 불려
日 쉽게 가기 위해 대구 머물러
광복 후에도 日강점기 그리워해
20180719
박중양이 대구군수와 경상북도 관찰사로 있으며 일본을 위해 저지른 대구읍성 파괴와 경제침탈 등을 ‘박중양의 참혹한 심술’이라는 제목으로 질타했다. (대한매일신보 1908년 11월4일자)
20180719

‘저 박중양이 구정부와 신정부의 매와 사냥개가 되어 여러 번 관찰사의 중임을 도득하여 도처마다 동포의 가련한 피와 진액을 빨아다가 자기 일신을 살지게 함은 일반 동포의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바이라. 이제 노노히 말할 것 없거니와~.’

대한매일신보 1908년 11월4일자에 실린 ‘박중양의 참혹한 심술’이란 논설이다. 신문은 당시 국한문판과 국문판을 따로 발행하고 있었다. 이 논설이 나올 때 박중양은 이미 이태 전에 대구군수를 지낸 뒤 경상북도 관찰사를 맡고 있었다. 이때 나이 30대 중반이었다. 그는 벼슬기간 언제나 일본을 향했다. 대구읍성 파괴와 협성학교 폐교, 경제 침탈 등은 일본을 향한 구애였다. 논설은 그런 박중양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묻고 있다.

박중양은 대구군수로 있을 때 일본인과 모의해 대구읍성을 없앴다. 그가 읍성을 철거한 것은 일본인들의 대구 장악을 도우려는 이유였다. 그는 대구읍성을 철거한 뒤에야 정부에 알렸다. 정부의 방침과는 어긋났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아들이라고 불릴 정도였던 그의 권세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달성을 대구의 일본인을 위한 공원으로 만들고 신사를 세운 것과 같은 맥락이다.

박중양은 대한제국의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그는 그곳에서 야마모토 노보루로 개명했다. 일본사람이 되기로 작정한 것이다. 일제 말 창씨개명이 벌어지기 반세기 전의 일이다. 그는 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스스로 일본군에 종군했다. 그 후 황제 등이 추천하는 일본 제국의회의 귀족원 의원이 됐다. 일본사람이 아니었지만 일본인 노릇을 한 것이다.

박중양은 박작대기로도 불렸다. 하지만 이는 박중양을 온전히 묘사한 표현은 아니었다. 그가 들고 다닌 장식을 한 지팡이는 한말 ‘개화장(開化杖)’이라고도 했다. 개화했다는 사람들이 자랑삼아 들고 다녔다는 의미다. 한편으로는 으스대며 들고 다닌 일종의 신분증 같은 물건이었다. 그의 지팡이는 한편으로 개화 친일세력으로 조선민중과 다르다는 표시였으리라.

그 즈음 신문은 ‘제2의 박중양’을 거론했다. (대한매일신보 1909년 1월31일자) 당시의 조선인들은 그의 실체를 간파하고 있었던 셈이다. 대구사람의 전통과 정신을 부정한다며 그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보도도 있었다. 게다가 박중양 같은 인물이 한 번 나오면 제2의 박중양 같은 인물이 줄을 잇게 된다고 우려했다. 한말의 언론은 일제강점기 친일반민족 부역자들의 득세를 이미 점치고 있었다.

박중양과는 상관없이 광복은 오고야 말았다. 반민특위가 구성되었다. 대구에서도 박중양 등 친일반민족 부역자들이 검거됐다. 그러나 이들은 곧 풀려났다. 영남일보 등 당시의 신문은 친일반민족 부역자들이 석방된 데 대해 나름의 이유를 달아 보도하고 있다. 친일세력이 미군정의 옹호를 받으며 옷만 갈아입었기 때문이란 것이다. 여차하면 일본 도쿄로 달아나기 쉬워 대구에 자리를 잡았다는 박중양. 광복되고 십년이 더 지나도 여전히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떵떵거렸다. 회고전 형식의 ‘술회’는 그렇게 쓰인 글이다. 그는 1957년에도 입길에 올랐다. 기관에 배부한 책자가 대통령을 모독했다는 것이다.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이 박사(이승만)가 미국세력이 없어지면 도망간다는 따위의 내용이었다. 여든이 넘은 그의 정신 상태를 핑계 삼은 때문이었을까. 검찰은 심신미약을 이유로 기소유예처분을 했다.

일본군 호위병을 둘 정도로 일본인의 권력으로 조선에서 권력을 누렸던 박중양. 대구사람이 아니면서 일제강점기 대구의 주인노릇을 한 것과 다르지 않다. 광복 후 그에게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뿌리가 같다(日鮮同祖)’는 그의 몸에 밴 생각이 죽는 날까지 그대로였던 것처럼.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