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영남일보로 보는 인물열전’ .9] 최문식

  • 허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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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7-26   |  발행일 2018-07-26 제29면   |  수정 2018-10-01
대구노동회 치부 담긴 비밀장부 찾아낸 항일노동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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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항쟁 직후 구속된 최문식 등의 재판이 열린 법정에는 방청객이 몰려 인원이 넘칠 정도로 부민들의 관심이 높았다. (영남일보 1947년 6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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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제1회 공판은 대구지방 심리원 제1호 법정에서 개정되었다. 이날 미명부터 운집한 방청인은 법원내외서 모여들어 법정에는 문자 그대로 입추의 여지가 없어 만원이 되었다. 9시40분 최문식씨를 선두로 네 피고가 입정하자 그 가족과 친지들과 목례한 후 변호인들이 착석 10시40분 김연수 부장심판관의 주심, 이검찰관 입회하에 심리가 진행되었는데~’

1947년 6월21일자 영남일보에 난 ‘좌익요인 공판개정 방청객으로 일시 대혼란’이라는 제목의 기사다. 이날 최문식 등의 재판은 대구부민의 이목이 쏠렸다. 방청인을 제한하고 도착순으로 방청권을 발행했지만 법정 안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법정 안팎에는 무장경관과 사복형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섰다. 당시 내로라하는 변호사가 그의 변호를 자처한 것만 봐도 심상찮은 재판으로 비쳤다.

최문식의 구속은 처음부터 석연찮았다. 1946년 10월 항쟁이 시작된 지 사흘째 되는 날, 그는 경찰을 적대시 말자는 선무방송을 했다. 하지만 이 선무방송은 되레 그의 행로를 뒤틀고 말았다. 선무방송을 하게 한 경찰은 곧바로 그를 체포한 뒤 구속했다. 항쟁 촉발의 계기가 된 미군정의 식량정책을 비판하던 그가 선무방송을 한 것은 경찰의 무장진압을 막으려는 타협적 고민의 결과였다. 이는 여운형의 건국동맹에 참여하고 경북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좌우합작을 지지하던 그의 이력과 맞닿아 있다. 그는 기소 후 죄명이 변경됐고 3년형을 선고받았다.


노동자들 하루 품삯 착취에 불만
비자금 장부 고발로 사회적 파장
日‘노동회 파괴’ 혐의 씌워 구속
광복직후에는 ‘대구시보’ 창간



그는 대구부에서 태어났다. 1920년 계성학교에 입학했으나 졸업을 하지 못했다. 퇴학이 된 것이다. 당시 학생들은 자신들의 요구조건을 관철하는 유효한 수단으로 동맹휴학을 곧잘 벌였다. 그가 3학년을 마칠 즈음에도 동맹휴업이 벌어졌다. 자격 있는 교사 채용을 해달라는 요구조건 등을 내걸었다. 이로 인해 다수의 학생이 퇴학처분을 당했고 그도 포함됐으리라.

그는 계성학교 퇴학 이후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거기서 그는 아내가 된 우신실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광주학생운동의 열기를 평양의 학생시위로 확산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른바 진보적 운동권 부부가 탄생한 것이다. 그 뒤 최문식은 1933년 대구노동자협의회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같은 해 가을에는 ‘기독교사회주의 비밀결사사건’의 주모자로 붙잡혀 또다시 감옥살이를 했다.

그의 이 같은 노동자에 대한 관심은 이미 이태 전 대구노동회 사건으로 확인되었다. 이 사건은 한마디로 노동자 착취사건이다. 착취사건을 일으킨 일당은 대구역에서 날품팔이로 연명해가는 인부들을 규합해 노동회를 결성했다. 그런 다음 하루 품삯에서 3~5전을 떼어 가로챘다. 그런 돈으로 대구부윤이나 경찰에 뇌물공세도 벌였다. 최문식은 이선장 등과 함께 노동자를 통해 비자금 장부를 찾아냈다. 비밀장부를 경찰에 고발하게 되었고, 당시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낳았다.

하지만 그는 대구노동회의 치부를 파헤친 대가로 일본경찰의 수사망에 올랐다. 총독부 경찰은 그가 적색노동조합 조직을 전제로 의식적으로 대구노동회를 파괴했다는 혐의를 씌워 6개월간 구속했다. 그의 대구노동회 개입사건은 고통 속에 신음하는 민중들을 위해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었다. 옥살이에서 풀려나온 후에 입학한 곳이 평양신학교다. 졸업 후 목사로서 대구에서 목회활동을 펼쳤다.

그는 광복직후 신문을 만드는 데도 힘을 보탰다. 대구시보 창간에 나선 것이다. 그가 언론경력이 없었음에도 잠시나마 편집국장으로 발을 들여놓은 것은 여론의 중요성을 간파한 때문이었다. 그는 일제강점기 항일노동운동과 민중계몽운동에 공을 들였다. 광복 이후에는 자주적 민주국가의 꿈을 꿨다. 하지만 그를 가리키는 신문제목에 ‘좌익’이 붙은 데서 보듯 시대가 한참 흐른 뒤에야 이름을 되찾았다.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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