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남자답지’ 않아도 괜찮아

  • 윤철희
  • |
  • 입력 2018-08-02   |  발행일 2018-08-02 제26면   |  수정 2018-09-21
‘탈 갑옷’‘탈 코르셋’운동을
서로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성별 고정관념서 벗어나야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 영위
제로섬 아닌 윈윈게임되길
20180802
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

여자 주인공이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진다. 모여든 사람들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로 향한다. 그는 젊고 제법 당당한 체격의 남자 주인공이다. 잠시 주저하던 남자 주인공이 물에 뛰어들어 여성을 구한다. 아! 아니다. 안타깝게도 남자주인공은 수영을 전혀 못하는 맥주병이다.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한다. 기대어린 탄성이 순식간에 힐난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아니 무슨 남자가 수영도 못한대” “수영도 못하는 주제에 물에는 왜 뛰어 들었대” 어찌어찌 구조된 두 주인공이 탈진한 채 대화를 나눈다. “수영도 못하면서 물에는 왜 뛰어들었어요?” “자기여자 하나 못 구하는 남자란 소리를 듣는 게 죽기보다 더 싫었거든요.” 자신을 구하고자 하나뿐인 목숨을 담보로 물에 뛰어든 남자를 보며 여자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는다. 여자는 그런 남자의 무모한 행동이 싫지만은 않은 표정이다. 드라마 속 ‘행복한 연애’의 에피소드가 하나 더 추가된다.

한동안 ‘탈(脫)코르셋’ 운동이 웹 공간을 달구더니 최근 ‘탈 갑옷’이라는 말이 뜨거운 주제로 떠올랐다. 탈 코르셋 운동은 사회가 여성에게 원하는 미적 기준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운동으로, 단지 긴 머리를 자르고 립스틱을 부러뜨리고 화장을 거부하는 표면적인 움직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코르셋처럼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 중심의 사회적 규율과 성차별적 현실에 맞서겠다는 주체적 선언으로 진화해 가고 있는 중이다. ‘탈 갑옷’ 운동 또한 남성다워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과 강요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의 일환인 것 같다. ‘탈 갑옷’이라는 말을 처음 접했을 때 내심 반가웠다. “아, 드디어 우리 남성들도 내적 성찰을 시작했구나. 지금의 성차별적 사회구조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힘든 짐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나 보다”라는 반가움에서다. 처음엔 ‘탈 갑옷’ 운동이 ‘남자다움’의 고정관념 틀 안에 남성을 가둬놓는 ‘맨 박스(Man Box)’를 해체하자는 이야기인줄 알았더니 지금 진행되는 움직임의 방향이 아직은 거기까지 도달하지 않은 것 같다. 성별 억압기제에 대한 남성의 진지한 성찰과 솔직한 내면 고백으로부터 출발한 운동이 아니라 ‘미투’나 ‘탈 코르셋’ 운동에 대한 반감으로 시작된 다분히 감정적인 대응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제기되는 문제를 보더라도 사회가 강요하고 있는 획일화된 남성다움의 틀에서 벗어나자는 취지보다는 “무거운 짐 들게 하지 마라” “화장실에 여성청소부는 왜 마음대로 들어오느냐”는 등 평소 여성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토로하는 것에 집중하는 인상이다.

가부장적이고 마초적인 사회에서 남성도 행복할 수 없다. 수많은 남성과 경쟁해서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여성을 가사와 육아에 매어둔 결과로 가족 부양의 책임이 남성의 어깨에 더 무겁게 올려진 것도 현실이다. 여성과 남성이 다같이 성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일은 결코 상대에게 손해를 끼치는 제로섬(zero-sum) 게임이 아니다. 오히려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윈-윈(win-win) 게임인 것이다. 단언컨대 이는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될 것이다.

머잖은 시간에 여성들이 ‘예쁘지 않아도, 조신하지 않아도’, 남성들이 ‘남자답지 않아도, 맘 놓고 울어도’ 괜찮아지길 바란다. 이를 위해서는 젠더감수성을 높여 성별 고정관념의 틀을 깨고자 하는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다. ‘탈 갑옷’ ‘탈 코르셋’ 운동이 지금처럼 서로 누구의 탓인지를 가르고 지엽적인 문제로 본질을 흐려 남녀 성대결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니라 냉철한 분석과 성찰을 바탕으로 진정한 의미의 성별억압기제 철폐운동으로 발전하길 응원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추방된 자라면 남성은 갇힌 자”라고 했다. 안에 있든 밖에 있든 경계가 사라져야 추방된 자도 갇힌 자도 없는 자유롭고 행복한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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