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영남일보로 보는 인물열전’ .12] 서진달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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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8-16 00:00  |  수정 2018-09-21
일제강점기 나체화로 주목…요절한 천재화가
20180816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20180816

‘한 사람의 태도라는 것은 우주의 존재와 함께 우리들 자신의 고난의 위치가 분명히 만인에게 제출하는 그 문제에 대한 자기 자신의 답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8세를 일기로 영면한 화가 서진달씨는 참담한 단종과 함께 예술에 대해서는 냉혹하였던 오늘날 우리 사회에 대하여 절규와 분노였습니다.’
 영남일보 1947년 3월7일자에는 세상을 떠난 한 사람의 화가를 기리는 추모 글이 실렸다. ‘천재화가 서진달의 최후기’라는 제목이다. 서진달과 이따금 접촉을 했던 지인이 두 차례에 걸쳐 애달픈 마음을 지면으로 드러냈다. ‘그의 눈길은 산마루의 노루가 골짜기의 물소리를 바라보는 듯한 향수에 젖어 있었음을 기억하고 있다’는 구절을 보면 글쓴이의 애틋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마흔도 되기 전에 요절한 벗을 떠나보내자니 더욱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나부’등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나체화 재능보이며 예술 활동
 가세 기울자 방황하다 병들어
 
 佛 화가 세잔 스승으로 여겨
 명암굛색채 등 닮으려고 노력


 그는 대구에서 났다. 하지만 대구에 머무른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부산에서 학교를 다녔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연구소에서 그림을 배우던 그는 1935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을 했다. 그때가 스물일곱이었다. 중국의 하얼빈공대에서 강의도 잠시 했다. 그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나부(裸婦)’ 등으로 수차례 입선했다. 이미 이때부터 나체화에 재능을 보였다.
 그가 대구에 진한 흔적을 남긴 것은 일본의 미술학교를 졸업한 뒤였다. 대구 계성중학교 미술교사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는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 열정을 다했다. 백태호, 김창락, 김우조, 김동철, 이서우 등이 그의 제자였다. 그들은 곧 지역미술계의 주춧돌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의 학교 밖 생활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다. 넉넉했던 집안의 살림이 기울어 파탄이 난 것이었다. 그 충격으로 술과 무절제한 생활이 이어졌고 심신은 피폐해져 갔다.
 갑자기 닥친 대구에서의 불행을 탈출하고 싶어서였을까. 미술교사 생활을 그만두고 고등보통학교의 학창시절을 보냈던 부산으로 갔다. 거기서 미술연구소를 열었다. 하지만 망가질 대로 망가진 그의 건강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게다가 결핵이 몸을 파고든 것이다.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고향인 대구로 다시 돌아왔다.
 고통 속에 방황하다 병이 들어 돌아온 그에게 고향의 인정은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대구로 돌아온 그는 이재민처럼 생활했다. 무료 진료를 받으며 도립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다가 동산병원으로 옮겼다. 그의 계성중 제자들이 번갈아가며 간호를 했다. 그가 내보이려 했던 예술에 대한 열의와 열정은 그렇게 사그라지고 말았다.
 ‘나의 X여. 그대는 지금 있는 처소를 알리지도 않느냐. 남도는 아닐 것이지. 평양에 살고 있느냐. 일본 민족이었더냐 혹은 멀리 불란서 촌에서 크고 있느냐. 그대의 나라도 모르는 그러나 국경도 민족의 별도 초월한다. 나의 화가요 그대의 나요 결국은 여기에 끝난다. 아! 실재 파악을 위하여 나로 하여금 본연의 자아, 진실한 개성을 불러 깨워 오직 실현할지어다.’
 영남일보 1947년 3월8일자 ‘천재화가 서진달의 최후기’ 2편에 인용된 그의 일기 구절이다. 일기는 그가 도쿄미술학교에 다닐 때 썼다. 그는 소묘를 좋아했고 프랑스의 화가인 세잔을 자신의 스승으로 여겼다. 세잔이 겪었을 인내와 고뇌를 일기에 담고 있는 이유다. 그는 인물이나 정물에서의 명암이나 색채 같은 조형요소도 세잔으로부터 받아들였다.
 그가 천주교회에서 마지막 고별식을 할 때는 예닐곱 명의 제자와 친구가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제자들이 유작 전람회를 열었다. 생전에 그는 조선 교회의 종교벽화는 전부 자기 손으로 그리겠다는 욕심을 냈다. 욕심이 아니라 믿음과 열정이었다. 벽화 대신에 그는 ‘손을 허리에 댄 나부’ 등 몇 점의 회화작품을 남겼다. 거리낌 없는 자유로운 삶을 나체화로 옮기고 싶었을까. 아니면 짧은 생애였지만 세차게 부는 바람처럼 살다 가려 했을까. 그의 호는 도풍이다.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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