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중심에 선 구미人 .6] 나라와 백성을 위해 헌신한 ‘봉곡 박수홍’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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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8-23   |  발행일 2018-08-23 제13면   |  수정 2018-09-18
왜적이나 다름없는 명나라 병사들의 약탈에 당당히 맞선 10세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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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봉곡동에 있는 봉곡재. 박수홍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밀양박씨 경주부윤공파 문중 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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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곡재 옆 야트막한 산을 오르면 박수홍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묘갈비는 절개와 지조의 상징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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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곡재 옆에 세워져 있는 박수홍의 신도비.

구미 봉곡동에서 태어난 박수홍은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열 살 되던 해 구원병으로 조선에 온 명나라 병사들이 되레 약탈을 하자 당당하게 맞선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유년시절부터 영특했던 박수홍은 1618년 과거에 급제해 요직을 두루 거쳤다. 특히 그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푼 목민관으로 존경을 받았다. 정묘호란이 끝나자마자 김제 금구현령으로 부임해 전란으로 초토화된 고을을 복구하고 어수선해진 민심을 수습하는데 사력을 다했다. 이러한 공로로 나라에서는 그를 승진시켰고, 백성들은 송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평양부서윤 시절에는 빠른 분석과 판단력으로 신속하게 일을 처리해 인정을 받았다. 함경도 북부의 온성부사로 부임해서도 어지러운 군정을 쇄신하고 궁핍한 백성들을 진심으로 보살펴 존경을 받았다.

구미 다봉에 자리잡은 이민선의 외손
고향사랑 담아 훗날 호 봉곡이라 지어
현재 봉곡동의 유래로 알려져

6세 때 아버지 여의고 의성에 머물러
왜란 중 현감 대신 명나라 장수와 담판
비상함 알아본 장수 “훗날 귀인 될 상”

정묘호란 후 금구로 내려가 민심 수습
4년 임기 마치자 백성들 송덕비 세워
평양 서윤 등 발탁…목민관으로 활약

#1. 명나라 장수가 알아본 소년의 비상함

벽진이씨(碧珍李氏) 이민선(李敏善)이 구미의 다봉(多蓬)에 자리를 잡았을 때 그는 그곳의 산세며 지세가 썩 마음에 들었다. 다봉은 쑥대가 많아 그렇게 불렸고, 변음되어 다붓·다복으로도 불렸다. 이민선은 마을 뒷산 이름인 북봉(北峰)을 호로 삼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외손 박수홍이 태어났다.

박수홍도 외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다봉이 좋았다. 하여 훗날 애명을 담아 자신의 호를 봉곡(蓬谷)이라 하였다. 이는 자연스럽게 마을의 이름이 되었다. 지금의 구미 봉곡동의 지명 유래는 박수홍의 이야기에서 시작됐다. 마을 주민들도 선하고 총명한 박수홍을 어여삐 여겼다. 하지만 슬픔도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고작 여섯 살에 겪은 이 일은 박수홍에게 아주 큰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결국 박수홍은 부친상을 당한 후 고향을 떠나야 했다. 그는 어머니를 따라 비안현감으로 재직중인 외할아버지 이민선이 있는 경상도 비안현(比安縣, 지금의 의성) 관사에 머물렀다.

비안에서의 생활은 하루하루 조심스러웠다. 그러던 중 박수홍이 열 살이던 해 나라에 왜란이 일어났다. 안 그래도 불안하고 혼란스럽던 와중,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명나라 군사들이 비안현에 들이닥쳤다. 조선을 구하고 왜적을 정벌하기 위해 파견된 구원병이었지만 하는 짓은 왜적과 다를 게 없었다. 설상가상 당시 비안현감 이민선은 공무로 자리를 비운 터였다.

“도와주러 왔거늘 현감이란 자가 코빼기도 안 비치다니 괘씸하다.”

명나라 병사들의 약탈이 시작되었다. 고을 백성들은 두려워 몸을 숨기기 바빴다. 하지만 어린 박수홍은 당당하게 명나라 장수 앞에 섰다.

“현감께선 도망가신 것도 아니고 일부러 자리를 비우신 것도 아닙니다. 일이 있어 잠시 마을 밖으로 나가셨을 뿐입니다.”

명나라 장수가 박수홍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물었다.

“몇 살이더냐?”

“열 살입니다.”

“후일 귀인(貴人)이 될 상이구나.”

그러고는 약탈을 멈추고 철수하였다.

#2. 가진 재능을 오직 나라를 위해

외할아버지 이민선이 비안현을 떠나면서 박수홍은 어머니와 함께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 봉곡으로 돌아온 박수홍은 학문에 열심을 다했다. 인근 마을에 학자 매돈(梅墩) 김번(金蕃)이 머물고 있다는 소식에 그에게 학문를 배우기도 했다. 그러던 1617년(광해군 9) 향시(鄕試)에 합격해 도성의 과장(科場)으로 향한 날이었다. 분위기가 험악했다. 일부 간사한 무리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생도들에게 ‘인목대비 폐위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는데 협조하라고 협박했다.

박수홍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여겼다. 자신의 이름을 패륜행위에 얹어줄 수는 없었다. 하여 뜻이 같은 이들과 빠져나와선 일절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 모든 불의를 보며 박수홍은 관로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결심했다. 이에 1618년(광해군10) 무오십년증광방(戊午十年增廣榜)에 응시했다. 증광시는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치러진 임시과거였다. 이 시험에서 박수홍은 을과(乙科) 2위에 올랐고,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걱정으로 외직을 자청하면서 성현찰방(省峴察訪)으로 내려가 1623년(인조1) 어머니가 이승을 떠날 때까지 지극정성으로 봉양했다. 그럼에도 박수홍은 슬픔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어려 아버지를 여읜 탓에 가르침이 적어 늘 한이었거늘 어머니마저 원없이 봉양하지 못하니 애가 끊어지는 것 같구나.”

이후로 박수홍은 스스로를 죄인인 양 거친 옷과 거친 음식을 먹으며 몸을 숙이고 살았다.

#3. 오로지 백성을 위한 마음

정6품의 전적(典籍)과 예조좌랑, 정5품의 예조정랑, 춘추관의 사관(史館)인 기주관(記注官)에 이르기까지 박수홍의 관로는 탄탄대로였다. 하지만 평탄한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다. 1627년(인조5) 나라에 변고가 또 일어나고 말았다. 이번엔 호란(정묘호란)이었다. 박수홍은 우선 인조의 강화도 몽진(蒙塵, 피란)을 호종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난이 끝난 후에는 김제 금구의 현령(縣令)으로 보내줄 것을 자청했다. 전쟁의 후유증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야 하는 조정으로서는 박수홍과 같은 인재가 직접 지역을 챙기겠다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금구로 내려간 박수홍은 초토화된 지역을 복구하고 어수선해진 민심을 수습하는 데 사력을 다했다. 그 과정에서 길지를 골라 허물어진 학궁(學宮, 학교)을 옮겨 새로 지었고, 영리하고 준수한 인재를 선발해 체계적으로 가르쳤다. 빠르게 안정돼가는 고을을 보면서 백성들은 목민관에게 애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나라에서도 이를 모를 리 없었다. 1628년(인조6) 당시 우의정 김류가 종사관 김반을 불러 충청우도와 전라도에 대한 비밀스러운 시찰을 맡겼을 때였다. 김반이 조사해온 내용을 토대로 박수홍을 비롯한 수령들에 대한 상벌을 논하는 자리에서 인조가 말했다.

“박수홍의 승진이야말로 참으로 잘한 일이다.”

4년의 임기를 무사히 마친 박수홍은 금구를 떠나야 했다. 백성들은 박수홍이 떠난 후에도 그를 그리워하며 송덕비를 세웠다.

박수홍은 다시 예조로 불려 들어갔다. 그리고 탁월한 업무처리를 인정받아 곧 평양부 서윤(庶尹)에 발탁됐다. 당시 평양은 서쪽 관문의 대로에 위치해 있어 사신과 전령이 빈번이 오가던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눈코 뜰 새 없을 정도로 응접도 많은데다 드나드는 사람이 많은 만큼 법망을 비껴가는 술수도 잦았다. 부임하는 이마다 통제가 어렵다며 골머리를 앓을 정도였다. 박수홍은 남달랐다. 사안에 대한 분석과 판단이 정확하고 처리가 신속해 문제가 쌓일 겨를이 없었다. 박수홍에게 민심이 쏠린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한 봉사(奉事)가 시기심에 저지른 모함 때문에 의금부에 잡혀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지은 죄가 없었기에 바로 풀려났다.

이후로도 여러 관직을 맡아 충심으로 일하던 1635년(인조13)이었다.

“변방에 오랑캐가 움직이는 기미가 있습니다.”

조정은 긴장했고 임금은 당시 사간원정언(正言)이던 박수홍을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시켜 함경도 북부의 온성부사(穩城府使)로 보냈다. 박수홍의 활약은 대단했다. 어지러운 군정을 쇄신하고 백성들이 상환 못한 묵은 곡물을 탕감해줌으로써 지친 병사와 궁핍한 백성들 모두에게 덕을 베풀었다.

그 공을 인정받아 정3품의 병조참지(參知), 승정원좌승지(左承旨), 형조참의(參議) 등을 거쳐 1640년(인조18)에는 종2품의 경주부윤(府尹) 겸 경주진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로 부임했다. 이때 인조는 박수홍의 3대를 축복했다. 증조부 박응종(朴應宗)을 통정대부 통례원 좌통례에, 할아버지 박희민(朴希閔)은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아버지 박정실(朴鼎實)은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증한 것이다.

#4. 길에서 떠나니 참으로 슬프도다

워낙 고된 일을 많이 겪은 데다 자식을 먼저 보낸 슬픔이 독이 되었는지 박수홍의 몸에 이상신호가 나타났다. 부임한 지 3년 만에 눈에 띄게 야위면서 기력 또한 빠르게 쇠해진 것이다. 주변에서 애면글면했지만 박수홍은 회복하지 못했다. 결국 1644년(인조22) 3월10일 집도 아닌 상주(尙州)의 객사에서 눈을 감고야 말았다. 그의 나이 57세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박수홍이 곽재우(郭再祐)와 교류한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박수홍이 과거를 보러 도성으로 향하던 길에 곽재우를 만났을 때였다. 곽재우가 대놓고 물었다. “나라가 난리통이거늘 과거는 보아서 무엇 하려는가?”

그러곤 술을 들이켜더니 나중엔 그 술이 괴롭다며 고개를 기울여선 귓구멍으로 술을 쏟아냈다. 기인의 기행이기도 했지만 이 이야기는 훗날 의병장으로 위세를 떨칠 곽재우가 자신의 본성을 곧이곧대로 드러냈을 만큼 박수홍과 친밀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현재 박수홍의 묘소는 구미 봉곡동에 있으며, 절개와 지조의 상징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지은 묘갈비가 세워져 있다. 묘소 아래에는 박수홍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밀양박씨 경주부윤공파 문중 재실인 봉곡재(蓬谷齋)가 자리하고 있다. 봉곡재 옆에는 박수홍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아울러 그가 선정을 펼쳤던 김제 금구향교(金溝鄕校)에도 백성들이 세운 송덕비가 있다. 문집으로 ‘봉곡집(蓬谷集)’이 있다. 봉곡집은 주관적인 평가를 배제하고 자신이 직접 겪은 사실을 연대기 형식으로 짧고 명료하게 서술한 책이다. 아울러 시를 통해 전란의 참상과 도탄에 빠진 백성들에 대한 염려, 시국에 대한 비분 등을 격정적으로 호소하기도 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문헌=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디지털구미문화대전. 조선왕조실록.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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