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달서책사랑 전국주부수필공모전] 대상作 ‘엄마는 무엇으로 너에게 남을까?’

  • 조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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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8-23   |  발행일 2018-08-23 제21면   |  수정 2018-09-21

늦은 결혼이 일상화되어 있는 요즘의 눈으로 봐도 나는 남들보다 꽤나 많이 늦은 결혼을 했다. 그 때문일까. 주변 사람들은 내가 결혼 후에 혹시나 아이를 갖지 못할까 마음 졸여 했다. 그러나 정말 다행스럽게도 내 나이 마흔에 딸아이를 얻었고, 지금은 돌이 막 지났다. 일하는 엄마이기에 우리 딸은 외할머니 밑에서 자라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딸아이의 “엄마”라는 소리는 할머니를 향해 있을 때가 더 많다. 그때마다 속상함보다는 매일 같이 있어 주지 못하는 미안함이 앞서는 것을 보면 이것이 부모의 마음인가 보다.

다른 아이들도 “엄마”를 먼저 말하고 그 후에야 “아빠”를 말한다고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딸아이에게서 “아빠”라는 소리를 듣기가 쉽지 않다. 아마도 주말부부인 탓에 일주일에 한 번만 아빠를 만나기 때문이리라. 마흔 중반에 어렵게 얻은 아이라 그런지 남편은 금요일 밤이면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오고, 월요일 새벽에 다시 전주로 출근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아빠의 이런 정성과는 상관없이 딸아이는 금요일 밤에 아빠가 오면 어김없이 울음을 터뜨린다. 낯가림을 하는 요즘 아빠가 낯설어서 그런 것이다. 그렇게 울음으로 시작한 아빠와의 대면은 주말을 지내며 화기애애하게 진행되다, 월요일 아침 아이가 눈뜨기 전에 예정된 이별을 하는 것이 우리 부부의 일상이 된지 오래다.

아이를 출산한 후, 우리 부부는 신혼집을 정리하고 홀로 살고 계신 친정어머니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남편은 자신이 없는 주중에 딸아이와 단 둘이 지내야 할 내가 걱정되었고, 나 또한 출산휴가가 끝나면 출근을 해야 하는데 어머니 집과 신혼집을 오가며 아이를 맡기고 다시 찾아가고를 반복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실 우리는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들어가겠다고 하면 어머니가 기뻐하실 줄 알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썩 내켜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24세에 결혼해 작년에 정년퇴직을 하셨다. 어머니는 이제야 자유부인이 되었는데 다시 손녀를 양육하며 발목 잡힐 생각을 하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하지만 딸이 늦은 나이에 얻은 귀한 생명을 마주하고 나니 차마 못 키워주겠다는 말씀을 못하셨고, 또 남편이 막내라서 시부모님이 다 돌아가신 후라 딸아이를 돌봐줄 다른 가족이 없다는 점 때문에 살림을 합치는 것을 허락하셨다.

살림을 합치는 과정에서 우리 부부는 예상치 못한 많은 어려움을 직면하게 되었다. 우선 냉장고도 2대, 밥솥도 2대, 이런 식으로 모든 살림들이 두 개씩 존재하게 되었다. 다다익선이라고 집만 넓으면 냉장고도 많을수록 좋겠지만, 어머니 홀로 사시던 집에 우리 신혼살림을 넣으려니 집은 턱없이 좁기만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골칫덩이는 바로 책이었다. 남편도 나도 책 읽기를 즐겨하는 사람이라 책이 없는 집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떻게든 책을 다 정리하고 들어오라는 것이 친정어머니의 주문이었고, 남편과 나는 책 정리를 시작했다.

대학에 근무하는 남편은 자신의 전공서적들을 정리해 아는 분의 창고에 맡기는 선택을 했고, 나는 200여 권의 책을 친정집이 있는 아파트 도서관에 기증했다. 다행히 우리가 살게 될 동에 아파트 도서관이 있어서, 여기에 그간 모아온 책들을 기증한다면 그나마 아끼던 책을 가까이서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내가 사랑한 책을 다른 사람들도 즐겁게 봐 주었으면 하는 소망이 담긴 선택이었다.

그러나 책을 사고 서가에 꽂는 일에 익숙하던 우리 부부가 책을 포기하는 데에는 상상 이상의 고통이 수반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고통은 그 많은 책 중에서 죽어도 포기할 수 없는 책을 가려 뽑는 일이었다.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책이 없었고, 어느 하나 추억이 담겨 있지 않은 책이 없었다. 때문에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 나는 결정을 내렸다. 바로 내 평생 가장 소중한 생명인 우리 딸에게 물려주고 싶은 책을 가려 뽑아보기로 한 것이다. 처음에는 10권을 목표로 시작했으나, 바다를 메우지 사람 욕심은 못 메운다는 말처럼 1권씩 2권씩 늘어나더니 결국은 15권이 되었다.

예전에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러하듯 우리 부부는 문과라서 그런지 숫자에 약하고 재테크 분야에서는 그 어떤 소질도, 적성도 발견하기 어려웠다. 항상 고만고만하게 살아갈 우리 부부는 딸아이에게 과연 무엇을 물려줄 수 있을까?

우스갯소리겠지만 요즘 중학교 아이들의 장래희망은 부자백수 또는 건물주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우리 부부에게는 건물은커녕 땅 한 평이 없다. 이런 현실에 슬퍼하거나 노여워하는 대신 우리는 딸아이에게 15권의 ‘인생 책’을 물려주기로 결심했다.

이런 부모의 마음이 우리 딸에게 얼마나 전해질지는 모르겠으나, 나이가 많은 탓에 더 오랜 시간 딸아이에게 부모 그늘을 드리워주지 못할까 걱정이 되는 마음을 담아 우리 부부는 이 책들을 가려 뽑았다. 그리고 이 책들과 함께 우리 부부는 먼 훗날 딸아이가 받게 될 편지 한 장을 미리 써 두었다.



<편지>

사랑하는 내 딸아, 모든 인간에게 있어 자기 앞의 생은 끝없는 이야기란다. 언젠가 너는 세상에서 가장 넓고 깊다는 부모 그늘을 떠나 넘어야 할 인생의 많은 산들을 마주하게 되겠지. 하나의 산을 넘고 또 하나의 산을 넘어, 다섯번째 산을 마주하게 될 내 딸아, 그 산 앞에서 너는 삶의 희망보다는 칼의 노래를 들을 수도 있겠지. 또 어떤 날엔 잃어버린 사랑 때문에 피에트라 강가에서 눈물 흘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딸아 중요한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아. 엄마는 25살에 죽기로 결심했던 베로니카가 살아 있는 오늘을 기적으로 여기며 살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새들은 왜 그 먼 페루에 가서 죽음을 맞이하는지, 또 하나뿐인 딸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한결같이 깃발을 들어 올리는 철도원의 마음을 네가 알게 되기를 소망해.

그래서 엄마는 기도한단다. 누구에게나 스승은 있다. 너에게 참 스승이 있기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정의란 무엇인지, 왜 도덕인가를 네가 알 수 있기를! 혼밥, 혼술, 혼영이 흔해진 세상이지만 혼자이기보다는 함께이기를! 혼자 못 사는 것도 재주임을 깨달을 수 있기를! 무엇보다 삶의 어려운 순간을 마주했을 때, 엄마와 함께 있음으로써 네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을 떠올려 주기를! 너의 피와 살을 만들어준 엄마의 음식들로 인해 따뜻했던 부엌을 기억해 주기를 기도한다.

사랑하는 딸아, 내 나이 마흔이 넘어 기적처럼 너를 만났다. 이미 나이가 많은 엄마는 시간과의 싸움을 하고 있단다. 언젠가 너의 곁을 떠나야 할 순간이 나를 찾아올텐데 엄마는 무엇으로 너에게 남을까?

엄마는 너의 곁에 이 15권의 책으로 남고 싶다. 딸아, 무언가를 간절히 소망하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는 연금술사의 이야기를 잊지마렴. 엄마가 영원히 네 곁에 있을 순 없겠지만 네가 읽는 그 책들이 엄마가 미처 다하지 못한 말들을 네게 전해줄 거란다. 몸과 마음과 영혼을 다해 사랑한다. 내 딸아!



우리 딸이 얼마나 더 자라면 이 편지들을 받게 될까? 지금으로서는 그 때를 알 수가 없다. 대신 일하는 엄마가 퇴근하면 어부바를 해달라고 등에 매달리는 딸아이를 업고, 오늘도 나는 새로운 출근을 한다.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문을 여는 우리 아파트 도서관으로 말이다. 아이가 아직 어려 도서관에 내려놓았다가는 자원봉사자 선생님이 애써 정리해 놓은 책들이 이리저리 바닥에 뒹굴게 되기 때문에 아이를 업고 도서관 이곳저곳을 걸어다니는 게 전부이지만 우리 딸도 이 외출을 좋아하는 편이다. 엄마 등에서 이 책 저 책 만져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가 보다.

그러다 나는 내가 기증한 책을 뒤적이는 아이들이나 동네 주민을 발견하게 된다. 좋다. 참 좋다. 내가 기증한 책인지 모르겠지만, 누가 기증한 책이면 어떤가. 그 책이 마음에 들고 읽어봐서 더 좋았으면 좋겠다. 그러라고 기증한 책이니 말이다.

“딸, 엄마 퇴근했어. 오늘도 엄마랑 어부바하고 도서관 가자.” 이것이 지금의 내 삶이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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