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영남일보로 보는 인물열전’ .13] 백기만

  • 윤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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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8-23 00:00  |  수정 2018-09-21
기자·시인으로 항일운동…조선총독부 맞서 춘추단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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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기만씨로부터 3.1운동약사 보고가 끝나자 긴급동의로 민전에서 발표한 선거규칙을 실천할 것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미군정청에 삼상결정 실천에 노력하는 미소 양 사령관에게 메시지를 각각 대회 명의로 보낼 것을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영남일보 1947년 3월3일자에 실린 3.1절 기념과 삼상결정시민대회 기사다. 이 기념식은 3굛1운동이 일어난 날을 기념해 민전이 주최했다. 이날 오전 10시부터 대회가 열린 달성공원에는 2만여명의 부민들이 몰려들었다. 3.1운동약사 보고가 이어졌다. 연단에 선 사나이는 조금 작은 편이지만 우렁찬 목소리는 청중들을 휘어잡기에 충분했다. 백기만이었다. 평상시는 말이 없었지만 마이크만 잡으면 사자후(獅子吼)의 연설로 청중들을 매료시켰다.
 

 청년운동·문학가로 활동
 광복후 언론계로 돌아와
 영남일보 논설위원 지내

‘대구 사람’ 자긍심 강해
‘대구시민의 노래’만들어


그에게 3.1절 기념식의 느낌은 남달랐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 김천에서 춘추단을 조직해 문예부장을 맡는 등 청년시절부터 항일운동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대구에서 났지만 금릉, 지금의 김천에서 지국기자로 활동하던 시절이었다. 취재보도활동을 하던 기자들이 춘추단을 만든 이유는 뚜렷했다. 당시 인쇄소 동맹파업이나 수리조합문제 등이 터졌고 기자들의 공동 대응과 단합이 절실했다. 조선총독부와 맞서는 언론활동을 벌이는데 조직이 필요했던 것이다.
 

‘지난 19일 신간대구지회에 설립대회를 열었는데 내빈축사를 한 백기만씨의 말을 중도에 중지시켰다 함은 이미 보도한 바 있거니와 대구경찰서 고등계에서는 (백기만)씨를 검거하는 한편 가택을 수색하는 등 엄밀히 취조하는 중이라더라.’

 ‘백기만 씨 엄조(嚴調)’라는 중외일보 1930년 4월23일자 기사다. 그는 앞서 열린 4월19일의 신간회 대구지회에서 내빈으로 참석해 축사를 했다. 그는 발언 도중에 경찰의 제지를 받고 연단에서 끌려 내려왔으며 대구경찰서 고등계에서 엄하게 조사를 받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는 당시 식민지 조선의 실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총독부의 눈에 거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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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발언이나 행동을 하는 조선인들은 즉각적으로 제재를 받았던 것이다.
 

그는 언제나 식민지 대중의 삶을 떠나지 않고 그 터전에서 활동하려 했다. 신간회 활동과 청년운동, 문사로서의 문예가 활동 등이 다 그랬다. 그런 그가 한 때 대구를 떠난 적이 있다. 1939년 만주로 갔다가 광복이 되자 언론계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김천에서 활동했던 춘추단 이래 20년 만이었다. 대구시보 주필에 취임했고, 그 뒤 영남일보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기자이자 기록자로서의 백기만은 어려운 시절에도 그 열정을 멈추지 않았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때 ‘상화와 고월’을 펴냈다. 1951년 여름이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이상화, 이장희 두 시인의 자취가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뒤 1959년에는 ‘씨 뿌린 사람들’을 기획해서 엮어냈다.
 

그의 관심은 어느 한 부문에 머무르지 않았다. 광복 직후 대구의 국악연구회에 가입하고 민속무용참관기 등을 신문 지상에 발표한 데서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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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수 있다. 우리 음악, 우리 조상들의 춤과 노래에 끌린 그의 예술적 심상이 묻어났다. 그는 또한 시인이었다. 1926년에는 자신이 주도해 1920년대 초기 시인들의 대표작을 묶은 ‘조선시인선집’을 펴내기도 했다.
 

기자에서 교사, 문예가 등으로 살아온 그의 말년은 그리 편치 않았다. 정치적으로는 혁신계로 명맥을 이어가며 사회대중당 노선을 지켰다. 하지만 4.19 혁명 이듬해에 터진 군사쿠데타로 혁명재판소에 끌려가는 신세가 됐다. 그 때 조사를 받던 중 뇌졸중으로 쓰러지며 큰 고통에 시달렸다. 그리고 몇 해 뒤 눈을 감았다.
 

목우 백기만. 그는 대구를 사랑했다. 대구사람인 것에 자긍심이 강했다. 일제강점기 한 잡지에 대구의 경치와 역사적인 유적을 소개할 정도로 그는 대구 지킴이였다. 그가 ‘대구시민의 노래’ 노랫말을 지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의 대구사랑은 여전할까. 어쩌면 짝사랑이었다고 여기지는 않을까.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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