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태의 제3의 눈] 동아시아 철도공동체의 가치

  • 윤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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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8-24   |  발행일 2018-08-24 제22면   |  수정 2018-09-21
동아시아철도공동체 구상
유럽연합·아세안을 품는 것
경제적 가치는 말할 것 없고
평화 담는 역사적 가치 높아
아이들 위한 우리세대 의무
20180824
국제분쟁 전문기자

두어 달쯤 전이었다. 중국 쿤밍과 라오스, 베트남, 미얀마, 캄보디아,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를 잇는 ‘쿤밍-싱가포르 레일웨이’를 취재하는 동안 내내 한 영국 친구가 떠올랐다. 30년 가까이 일본 니혼대학 교수로 일해 온 그는 아홉 살 때부터 홀로 여행길에 올라 열네 살 무렵 일찌감치 유럽을 다 돌았고, 대학 시절부터는 아시아를 섭렵했다. 예순을 코앞에 둔 요즘도 틈만 나면 온 세상을 헤집고 다닌다. 그의 어릴 적 여행 밑천은 시골 역무원으로 일했던 아버지가 받아온 공짜 기차표였다고 한다. 동서고금을 줄줄 꿰고 10여개 외국어를 입에 달고 다니는 이 세계시민의 인생은 국경을 넘나드는 기차 여행에서 비롯된 셈이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한없이 부러웠다. 더 깊은 속내를 말하자면, 국경열차를 경험할 수 없는 갇힌 한반도 출신으로 몸에 밴 심리적 장벽의 변종인 시샘 같은 게 아니었던가 싶다. 돌이켜보면 국경열차는 어릴 적 내 꿈이기도 했다. 해서 나는 30년쯤 전 동남아시아 첫 취재 길에 올랐을 때 모든 일을 접어놓고 국경열차부터 탔다. 태국에서 말레이시아를 거쳐 싱가포르까지 가는 2박3일 동안 줄곧 가슴이 두근거렸다. 근데 기차에서 만난 태국, 말레이시아, 프랑스, 네덜란드 사람들 가운데 그 국경열차를 대수롭게 여기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세상 사람들한테는 그저 일상일 뿐인 국경열차가 왜 우리한테는 꿈이었던가!” 싱가포르 역에 닿을 즈음 나는 남몰래 속울음을 삼켰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나 대통령 문재인이 올 8·15 경축사에서 ‘동아시아철도공동체’를 입에 올렸다. 경축사 전문을 훑어보니 이 구상은 남북과 중국, 러시아, 몽골, 일본, 미국을 포함한 동북아다자평화안보체제를 통해 핵문제를 해결하고 평화를 다지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 알맹이는 “모든 걸 걸고 전쟁을 막겠다”는 한마디다. 이 동아시아철도공동체는 평화가 그 굴대라면 물류 이동을 통한 경제적 가치와 인적 교류 확대를 수레바퀴쯤으로 볼 만하다. 이 구상은 그동안 문재인정부가 말해온 외교 다변화정책에도 좋은 밑감이 될 듯 싶다. 이 구상을 실현하면 동북아시아뿐 아니라 유럽연합과 아세안을 저절로 품에 안게 된다. 러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중국을 거쳐 동남아시아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무엇보다 아세안의 심장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다. 그게 앞에 말한 쿤밍-싱가포르 레일웨이다. 정치·외교적 가치는 말 할 나위도 없고 경제적 가치를 따져도 아세안은 우리한테 둘째로 큰 교역상대이자 투자지역이다.

이쯤에서 하나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연장이 있어야 집도 짓는다.’ 동아시아철도공동체를 놓고 야당과 보수언론은 ‘북핵 해결 우선’을 외치며 삿대질부터 해댔다. 이 동아시아철도공동체가 꼬인 핵문제를 풀겠다고 들고 나선 연장이란 것쯤은 동네 장서방도 이서방도 다 아는 판이고 보면, 그 삿대질이 번지수를 잘 못 찾은 꼴이다. 게다가 전쟁 방지는 시민 대표선수인 대통령의 첫째 의무다. 그게 대통령이 시민을 지키라는 헌법의 명령이다. 이념이나 정쟁거리로 치고받을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1550년 독일에서 탄광용 궤도차가 등장했고, 1807년 영국에서 승객용 마차철도가 달린 이래 20세기 들어 내연기관과 전철 개발로 철도는 인류사에서 최대 운송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그사이 철도는 대량 운송수단으로 산업화의 상징이면서 한편으로는 영국과 일본을 비롯한 식민주의자들의 침탈 도구 노릇을 했다. 동아시아철도공동체는 지금껏 철도사에서 볼 수 없었던 반전과 평화를 달고 나왔다. 이 구상을 역사적 가치로 판단해야 하는 까닭이다.

다시 꿈을 꾼다. 우리 아이들은 물리적·심리적 장벽을 넘어 기차를 타고 평화로운 세상으로 마음껏 뻗어나가 멋진 세계시민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우리 세대의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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