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영남일보로 보는 인물열전’ .14] 박민천

  • 윤철희
  • |
  • 입력 2018-08-30   |  발행일 2018-08-30 제29면   |  수정 2018-09-21
일제강점기에 영화·연극기획자로 ‘문화운동’
20180830
일제강점기 영화와 희곡, 연출 등을 공부한 박민천은 광복 이후 낙랑극회와 신예술무대 등의 공연 기획자로 참여했다. (영남일보 1946년 2월2일자)
20180830


‘2월1일부터(7일간 2일·3일은 오전 10시부터 3회 속연) 낙랑극회’.

1946년 2월2일자 영남일보의 공연 광고다. 함세덕이 연출한 번안 작품인 ‘산적’을 무대에 올린다는 내용이다. 산적은 낙랑극회의 창단공연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관객들을 만나는 중이었다. 대구에서는 만경관에서 일주일간 공연을 했다. 관객이 제법 들었는지 공연 중에 만원사례 광고를 낼 정도였다. 낙랑극회는 광복 직후에 결성된 연극단체다. 이 단체에는 일제강점기부터 대구에서 활동을 했던 박민천도 공연기획자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봉화에서 태어났다.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고향을 떠나 대구로 왔다. 대구농림학교를 다니다 퇴학을 당했다. 그때가 1932년이었다. 퇴학은 독서회 활동과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학교를 쫓겨난 후 일본 도쿄로 건너가 희곡과 연출, 영화 공부를 했다. 1935년 6월에는 도쿄의 조선인 연극인들이 진보적 예술을 추구하며 만든 ‘조선예술좌’라는 극단에 들었다. 극단 창립 후 대구로 돌아왔다 다시 도쿄로 가려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만경관에서 홍보를 담당하는 일자리를 찾아 눌러앉은 이유다.

일본에서 희곡·영화·연출 공부
만경관에 취업한 후 홍보 담당
잡지 발행하며 대구청년과 소통



‘조선영화건설본부와 대구영화협회의 공동주최 도학무과와 경북문화건설연맹의 후원으로 오는 27일부터 3월1일까지 부내 만경관에서 해방뉴스 1보로부터 제5보까지 또 특제1보로부터 제3보까지를 동시 상영할 터인데 매일 주간은 학생 야간은 일반에 공개할 터인데~’.

1946년 2월23일자 영남일보에는 만경관에서 해방뉴스를 상영한다는 기사가 났다. 만경관은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영화관이다. 불타 없어진 그 자리에 조선인의 조합제 영화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만경관이 조선인 전용극장으로 불린 것도 이 때문이다. 식민지 조선인의 울분을 공유하고 일제에 대한 저항의 뜻을 모으기에는 알맞은 문화공간이었던 셈이다. 그는 그런 만경관에 터 잡아 영화운동을 펼쳤다.

당시 만경관에서는 ‘만경관 뉴스’라는 일본어로 된 잡지를 발행했다. 그의 역할이 컸다. 만경관 뉴스는 단순한 영화홍보 잡지의 기능만 수행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와 연극운동을 벌이는 식민지 대구청년들에게는 소통의 매개체로 인정받았을 것이다. 게다가 만경관은 강연회나 시민대회, 동화·동요대회 등 다양한 모습으로 대구 부민들 곁에 있었다. 잡지 발행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도 부민들과 소통한 셈이다.

그의 잡지 발행 경험은 영화관련 동인지의 간행으로 이어졌다. 문인과 영화인들이 모여 영화의 이론적 발전을 꾀하고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만들려고 한 영화예술지 간행에도 참여한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1940년에는 조선영화주식회사 제작진으로 합류하기도 했다. 그는 한때 자신이 쓴 시나리오인 ‘황혼’을 영화로 제작하는 과정에서 연출을 맡기도 했다. ‘황혼’은 신문의 신춘문예 시나리오 공모에서 1등을 수상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촬영은 제작자가 검거되면서 중단되고 말았다.

그는 해방공간 내내 공연기획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1949년 3월에 조직된 신예술무대의 창립공연에 기획자로 참여한데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또 반민특위의 활동과정을 영화로 촬영해 기록으로 남기는 계획에도 참여했다. 반민특위 관련자의 진술 등 갖가지 영상기록을 통해 후세의 교훈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계획은 특위의 활동이 벽에 부딪히며 수포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영화와 희곡, 연출 등을 공부했다.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수상을 할 정도로 글쓰기 실력도 뛰어났다. 광복이 된 뒤에도 이론과 실제에 다가서려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작지만 꼭 필요한 자리에 있었고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한 적이 없었다. 드러나는 일을 드러나지 않게 했다.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