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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혜숙의 여행스케치] 문경 산양면 현리 경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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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미디어부기자
  • 2018-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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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굽이길 너럭바위 정자에 누워 바람·강물소리나 들을까

금천 부벽의 경체정. 원래 현리 마을 안에 있던 것을 1971년 이곳으로 이건했다.
양애 채득호를 모신 영모재와 영모사. 1790년경에 건립, 1911년에 중건했다.
문경의 산양면은 신라 시대 근암현(近縣) 또는 근품현(近品縣)이라 했다. 경덕왕 때 가유현(嘉猷縣)으로 고쳤고 고려 초에 산양현(山陽縣)이 돼 지금까지 이어진다. 산양의 비단 같은 금천(錦川) 변에 천년이 넘은 마을이 있으니, 옛날 현 소재지라 하여 현리(縣里)다. 임진왜란 즈음부터 인천채씨(仁川蔡氏)가 세거해 글 읽는 소리가 장장한 마을이었다. 이제 창연하고 창대했던 시간은 요원하나, 고샅길에 누운 고요가 흐르는 물소리에 뒤척인다.

비단같은 금천변 천년넘은 마을 현리
상주 살던 간송 채유부 정착, 후손 번성
금천 작은 봉우리 기댄 정자 ‘경체정’
1935년 조부 7형제 우애 기리며 건립
원래 마을안 위치…71년 금천물가 옮겨

배 형국 마을, 침몰될까 샘도 파지 않아
채득호 모신 사당 영모사·재실 영모재
꽃과 나무 많아 불려진 고택 ‘화수헌’
도시청년 운영 한옥 게스트하우스 변신

◆부벽의 경체정

마을 앞 금천 물가의 층층 너럭바위 위에 작은 봉우리가 솟아 있다. 거기 바위에 다리 뻗고 봉우리에 등 기대어 정자 하나가 앉아 있다. 안내판이 없으니 난감하다. 이력을 아는 이는 적으나 강태공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 한다. 바위는 부벽(浮壁)이라 불린다. 영조 때의 문신으로 대사헌 등을 역임한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은 금천 물길 따라 청대구곡(淸臺九曲)을 설정했는데 제2곡 벽정(碧亭)이 바로 이곳 부벽을 안고 도는 물굽이를 가리킨다. ‘이곡이라 산이 높고 푸름 들려 하는데(二曲山高翠欲浮)/ 고인의 띠집이 층암의 언덕에 기대어 있네(故人茅棟倚層丘).’ 청대의 시대에 이곳에는 옛 사람의 띠집이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 그 자리에는 경체정(景亭)이 자리한다. 정자는 1935년 인천채씨 채묵진(蔡默鎭)과 아들 채홍의(蔡鴻儀)가 할아버지 7형제인 채성우(蔡性禹), 영우(永禹), 약우(若禹), 현우(鉉禹), 장헌(章獻), 용우(鏞禹), 장오(章五)를 기리기 위해 지은 것이라 한다. ‘경체’는 시경(詩經)의 소아(小雅)편 ‘상체지화(常之華)’에서 따온 말로 ‘형제간 우애가 깊어 집안이 번성한다’는 뜻이다. 정자는 원래 마을 안에 있었는데 1971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청대의 제자 근품재(近品齋) 채헌(蔡)은 스승의 구곡을 계승해 산양구곡(山陽九曲)을 설정했는데, 그중 제4곡 형제암(兄弟巖)이 또한 이곳이다. 형제암은 경체정 앞 부벽 아래 물속에 두 개의 바위로 앉아 있다고 하나 지금 그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정자에 오르면 푸른 금천이 눈앞이다. 금천은 산양천(山陽川) 혹은 금강(錦江)이라고도 부른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백사장이 넓었고 젊은이들이 모여 씨름을 하거나 배구를 했다고 한다. 정자 아래 조그만 정원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소박한 풍광을 어르는 한 점 호사다. 너럭바위는 과연 낚싯대 드리우기 좋겠고, 보다 게으르다면 노니는 물고기들을 가만 바라보기만 해도 좋겠다. 아니면 정자에 누워 ‘바람 따라 베개 옮겨 강물소리’를 들을까.

정자 아래 조그만 정원에 소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소박한 풍광을 어르는 한 점 호사다.
◆채씨마을 현리

현리에 인천채씨가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몇 해 전이다. 상주에 살던 간송(澗松) 채유부(蔡有孚)가 현리의 순천박씨와 혼인을 하고 이후 가족들을 데리고 현리로 들어왔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간송의 네 아들 중 셋째인 양애(陽崖) 채득호(蔡得湖)를 입향 시조로 여기며 ‘참봉 할배’라 친근하게 부른다. 형제들 중 그가 마을에 자리를 잡았고 그의 후손들이 가장 번성해서란다. 채득호는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곽재우와 함께 의병에 참여했으며 이준(李埈)·정경세(鄭經世) 등과 향병(鄕兵)을 일으켜 왜군의 침입에 맞섰던 인물이다. 또한 향약을 만들고 평생 학문에 정진했는데, 사림으로부터 ‘산양에 문학이 성함은 채양애로부터 비롯되었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의 또 다른 호는 부벽정(浮壁亭)이다. 어쩌면 부벽의 옛 띠집이 그의 정자였던 것은 아닐까.

마을은 배 형국이라 한다. 그래서 마을이 전복되지 않도록 집을 높이 짓지 않았고, 마을이 침몰하지 않도록 샘을 파지도 않았다. 지금 마을에 있는 우물은 그리 오래된 것들이 아니다. 현리의 가장 왼쪽 골목으로 들어선다. 널찍한 골목길에 토석 담이 정갈하다. 집들이 높지 않으니 담장도 낮은 편이다. 지금은 담장에 기와가 얹어져 있지만 원래는 이엉을 엮어 올렸었다고 한다. 헌 이엉을 걷어내지 않고 해마다 그 위에 새 이엉을 덮어 지붕은 토담의 높이만큼이나 층층이 쌓여 있었다 한다. 아쉽다. 오래된 공덕과 묵은 애착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다.

긴 담장 위로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이 보인다. 채득호를 모신 사당 영모사(永慕祠)와 재실인 영모재(永慕齋)다. 골목을 돌아 안으로 들어가 보니 사당과 재실이 마을회관인 부벽정사(浮碧精舍)와 한 울타리 안에 자리한다. 특이하다. 마을의 행정 공간과 문중의 제의 공간이 합일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동성반촌이라 가능한 일일 것이다. 마을회관을 지을 때 영모재보다 높지 않도록 설계를 고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도 춘추향사를 올리는데, 마을 어른들은 물론 객지에 나가 있는 출향인사들까지 두루 참여해 성대하게 치른다고 한다.

◆화수헌

영모재 가는 골목 입구에 커다란 한옥이 있다. 1800년대에 지어진 채철재 고택으로 꽃과 나무가 많아 화수헌(花樹軒)이라 불렸다고 한다. 안채는 채씨가 마을에 정착하기 이전의 건축물일 수도 있다니 정말 오래된 집이었다. 고택은 폐가로 방치돼 있었는데 문경시에서 매입해 복원 정비했다. 그리고 지금 한옥 게스트하우스로 문을 열었다. 운영은 5명의 도시청년들로 구성된 ‘리플레이스’팀이 맡았다. 그들은 경북도의 ‘도시청년 시골파견제’ 정책의 대상자로 선정돼 이곳으로 왔다. 도시의 청년들이 농촌·어촌·산촌 마을로 이사 와서 일자리도 만들고 마을공동체도 복원하자는 것. 청년들은 이곳에서 살다시피 하더니 이제는 아예 문경 시민이 되었다.

게스트하우스의 이름은 옛 이름 그대로 화수헌. 이 마을의 어느 고택 사랑채에도 ‘화수헌’ 현판이 걸려 있다. ‘화수’는 자손의 번창과 집안의 번영을 의미한다. 한때는 현 소재지였고, 또 한때는 100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던 현리. 지금은 그 절반으로 축소되었고, 곳곳에 폐허도 보이고, 조심스레 높여 세운 집도 보이는 마을. 헤아리기 어려운 요원한 시간을 넘어 이제 현리는 새로운 ‘화수’의 시대를 시작하고 있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정보

경부고속도로 대전 방향으로 가다 김천분기점에서 45번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점촌함창IC로 나간다. 문경시청 쪽으로 가 중앙로를 따라 계속 가면 산양산업단지다. 단지 끝에서 좌회전해 직진하면 추산로·금천로가 이어진다. 금천로에서 금산교를 건너 금천강변길로 가면 좌측에 현리, 우측 천변에 경체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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