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의 고장 청송 .15] 하늘도 감동한 효자 일송 조규명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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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9-12   |  발행일 2018-09-12 제14면   |  수정 2018-09-12
“아픈 부친이 꿩 먹고 싶다고 하자 간절히 기도…하늘서 꿩 날아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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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현동 창양리에 있는 조규명의 효자각. ‘하늘에서 내린 효자’로 불릴 만큼 효행이 남달랐던 조규명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전면에는 ‘중추원의관함안조공규명효행비(中樞院議官咸安趙公圭明孝行碑)’라 새겨져 있다.

청송 현동의 눌인천(訥仁川)가에 함안조씨(咸安趙氏) 마을이 있다. 빛이 넘치는 땅 창양리(昌陽里)다. 바로 이웃한 안덕의 문거리에 살던 조규명(趙圭明)이 창양 땅에 들어와 점차 마을을 이루었는데, 마을은 새로운 창양이란 뜻에서 신창(新昌)이라 했다. 마을 입구 한길 오른쪽 숲속에 효자각이 동그마니 자리한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린 효자’라 불렸던 조규명의 효행 사적을 세상에 널리 알려 주는 비각이다.

#1. 마을의 재동 조규명

조규명은 생육신 어계(漁溪) 조려(趙旅)의 후손으로 남포(南浦) 조순도(趙純道)의 10세손이다. 아버지는 금부도사 조성욱(趙性旭)으로 인심 좋기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한다. 조규명은 1860년 1월6일 청송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순화(舜和), 호는 일송(逸松)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재주가 뛰어났는데 7세 때 한시를 지어 이웃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또한 예의범절이 바른 아이였고, 부모는 물론 이웃 어른들을 섬기는 마음씨가 깊었다고 전한다.


어릴 적부터 어른 섬기는 마음씨 깊어
마을노인 거처 청소·잔심부름 도맡아
아버지가 학질 앓자 형과 정성껏 간호
약 구하다 길 잃으니 호랑이가 앞장서고
꿈에 신령 나타나 특효약 찾도록 도와
을미사변 땐 안동의진 들어가 항일투쟁



조규명은 매일 마을 어른들을 찾아뵈었다 한다. 노인들이 거처하는 방을 깨끗이 치우고 노인들의 잔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어릴 때부터 노인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그는 모든 이웃이 아끼고 귀여워하는 재동이었다. 노인들은 규명이 나타나지 않은 날이면 집으로 찾아가 소식을 물을 정도였다. 자라서는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그는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을 지냈으며 충의참봉(忠義參奉)이라 불렸다.

#2. 하늘에서 내린 효자

조규명은 특히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아침저녁으로 부모님의 거처를 찾아 그 날에 일어난 일들을 소상히 이야기하는가 하면 출타할 때는 사연을 자세히 말씀 올리는 친근한 아들이었다. 아버지 조성욱은 학질을 앓는 등 자주 몸이 아팠다고 한다. 조규명은 형 규집(圭執)과 함께 정성껏 간호하며 온갖 약을 다 써보았으나 병은 쉬이 낫지 않았다.

어느 날 부친은 “규명아 오늘은 꿩고기가 먹고 싶구나. 꿩고기만 먹으면 기운이 날 것 같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하였다. 사냥을 할 줄 몰랐던 조규명은 그날부터 산에 들어가 산신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수 일이 지나자 난데없이 꿩 한 마리가 움막으로 날아들어 납죽이 엎드리더니 꼼짝을 하지 않았다. ‘하늘이 내린 약’이었다. 또 한 번은 한밤중에 위독해진 아버지를 위해 칠흑 같은 어둠속을 헤매 다녔다. 마침내 약을 구했지만 그는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밤이라 길을 잃고 말았다. 그러자 호랑이 한 마리가 길을 가로막고 넙죽이 엎드려 꼬리를 흔들더니 앞서 나아가기 시작했다. 호랑이의 도움으로 집에 도착하니 사람들은 이 또한 ‘하늘의 도움’이라 했다.

고령의 아버지가 또 다시 병이 났을 때는 백방으로 약을 찾아보았으나 구할 수 없었다. 하루는 문간방의 한 과객이 말하기를 ‘잔디만 있는 산에 사는 산토끼의 간과 봄에 나는 송이버섯이 특효약’이라 했다. 아버지는 ‘잔디만 있는 산에는 토끼가 살지 않으며 봄에는 송이버섯이 나지 않는다는 뜻’이니 약 구하기를 단념하라 했다. 그러나 조규명은 형과 함께 약을 구하기 위해 애쓰면서 병간호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꿈에 신령이 나타나 한 장소를 가르쳐 주었다. 꿈에서 깨자마자 곧장 신령이 가르쳐 준 장소를 찾아갔다. 정말 산토끼가 바위틈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송이버섯이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이웃들은 한 집에 두 효자가 났다고 부러워하며 그의 효성을 ‘출천지효(出天之孝)’라 했다. 이러한 전설 같은 이야기들은 희미해져가는 옛 시간들 속에서도 기억되고 있으며 비석에 새겨 훗날로 전해지고 있다.

#3. 함창 태봉 전투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에 분노한 조규명은 스승 김도화가 이끄는 안동의진에 들어갔다. 그는 경북 연합의진(聯合義陣)의 함창(咸昌) 태봉(泰峯)전투에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상주의 농민들은 간악한 향임이나 교활한 아전 및 토호들의 탐학과 수탈에 시달리고 있었다. 조선과 일본의 국교 확대 이후 국내의 쌀이 일본으로 대량 유출되고 있었고 상주와 함창 관원들은 쌀을 수출하기 위해 농민들을 착취했다. 쌀값은 폭등했고 농민들은 생존권을 위해 싸웠다. 상주에서는 이미 1862년에 임술농민항쟁이 있었고, 1891년 함창농민항쟁, 그리고 18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지는 처절한 농민항쟁이 있었다.

그 무렵 일본군은 경복궁을 포위해 친일 개화정권을 수립, 강제로 개혁을 단행하는 한편 청국 군함을 무차별 공격해 청일 전쟁을 일으켰다. 이 때 일본군은 전쟁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서울과 부산을 잇는 주요 통로 80리마다 병참부를 설치했다. 그 결과 선산의 해평과 상주의 낙동, 함창의 태봉에 약 40명 규모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1894년의 항쟁에서 일본군은 토호 양반세력과 합세해 수천 명의 동학 농민군을 참혹하게 학살했다. 이에 반봉건 성격의 농민운동으로 시작된 상주의 농민운동은 점차 반외세 성격의 민족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가운데 운강(雲崗) 이강년(李康秊)이 1896년 1월 고향인 가은에서 가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날, 안동 관찰사 김석중 등을 체포해 가은 농암장터 군중 앞에서 그들의 매국행위를 규탄하고 참수했다. 같은 날 이강년 의병대는 김도화 의병대 등 경북 각지의 의병대와 합류하여 예천군수 유인형, 의성군수 이관영, 영덕군수 정재관 등 매국노를 응징했다. 그리고 3월26일 제천, 안동, 선성, 봉화, 영주, 순흥, 풍기 등 7개 군의 연합의진은 함창 태봉에 주둔한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했다. 전투는 4일간 이어졌지만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과 우세한 무기에 밀려 참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해 고종의 의병 해산령이 내려진다. 조규명은 동지들과 후일을 기약하며 고향으로 돌아왔다.

#4. 일송과 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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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연합의진의 함창 태봉전투에 참여했던 조규명은 이후 청송으로 돌아와 일송정에서 은거했다. 일송정은 기역 자 툇마루를 앞에 두고 2칸 장방, 중방 1칸, 장방 1칸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고향으로 돌아온 조규명은 일송정(逸松亭)에 은거했다. 일송정은 아들 후송(後松) 조용정(趙鏞正)이 아버지를 위해 지은 것으로 후송당(後松堂) 뒤편 산중턱에 숨은 듯이 자리한다. 수풀이 우거진 좁장한 산길을 오르면 하늘을 향해 선 측백나무가 파수하듯 길을 막는다.

측백나무를 빙그르 돌아서면 동그마한 양지 속에 고요히 앉은 일송정과 마주한다. 정자는 기역 자 툇마루를 앞에 두고 2칸 장방, 중방 1칸, 장방 1칸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누각에 오르면 후송당 앞의 문전옥답과 멀리 길안천과 현동면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들 후송 조용정 역시 1907년 청송 산남창의진(山南倡義陣)에 참여했다. 대구로 나가 무기를 구해오고 집에서 직접 실탄을 만들어 의병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의병활동을 펼쳤다고 한다. 또한 후송은 일찍부터 의술을 익혀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했는데, 그 의술과 덕행으로 인해 원근에 명성이 자자했다고 전해진다.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교육에 남다른 뜻을 품었던 후송은 광복 후 현동에 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그의 손자는 부동산 전부를 학교에 기부했다.

조규명은 전쟁터에서 죽지 못하고 살아 돌아왔음을 후회하면서 일송정에서 독서로 소일하다 1935년 9월29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효자각은 아들 후송 조용정이 건립했고, 증손 조창래(趙昌來)가 중수했다. 비각의 전면에는 ‘중추원의관함안조공규명효행비(中樞院議官咸安趙公圭明孝行碑)’라 새겨져 있으며 비문은 명암(明庵) 이태일(李泰一)이 지었다. 조규명의 비명(碑銘) 역시 이태일이 지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효자의관조공(孝子議官趙公)’.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자문=김익환 청송문화원 사무국장
▨ 참고=청송군지, 청송의병 사이버박물관 자료,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국가보훈처 자료, 청송누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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