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진의 사필귀정] 정치가 국민의 분노에 답할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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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9-12   |  발행일 2018-09-12 제30면   |  수정 2018-09-12
20180912
대구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이번 여름 우리나라는 전례 없이 무덥고 유난히 습했다. 이런 유별난 날씨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격하게 분노하는 대중의 목소리가 올 상반기 내내 숨 가빴다. 지난 1월 서지현 검사가 실시간 뉴스에 직접 출연하여 실명으로 검찰 고위 간부의 성폭력을 폭로하면서 촉발된 용기 있는 고발이 유력 정치인과 공연예술계의 잇단 성폭력 폭로로 이어져 ‘미투 운동’이 온 나라를 휩쓸었다. 여름에는 홍대 누드몰카를 둘러싼 편파수사 논란이 혜화역 시위로 이어졌다.

일련의 사안들은 대중의 힘이 여과 없이 드러난 사례이자 대중의 분노가 사회를 바꾸는 힘이라는 사실을 널리 선포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력 정치인은 법적인 판단 이전에 이미 나락으로 떨어졌고, 공연예술계의 대부와 힘 있는 유명 연예인들이 구속되거나 사회적으로 매장되면서 파멸을 맞이하였다. 대중의 분노는 비단 힘 있는 사람에게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다. 평범한 시민들도 일상의 성차별적인 태도와 행동을 자제하는 의식적 노력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처럼 대중의 분노는 질풍노도와 같은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다.

질풍노도와 같은 여름을 지나면서 우리 사회의 성차별적 관행은 근본적으로 변화하였는가? 대답은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일반 직장과 공직 사회에서 ‘펜스 룰’이 공공연하게 언급되기도 하고, 여성을 중용하거나 채용하지 않으려는 시도가 감지되기도 한다. 일반 시민 사이에는 여성 관련 이슈에서 불필요한 논쟁에 휘말리지 않거나 방관자가 되려는 태도가 만연하는 등 과잉방어라 할 만한 반응들이 일상화되고 있다. 특히 일부 남성들이 여성 관련 이슈에는 관여하지 않고 기피하면서 공론이 형성되지 않는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대중의 분노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변혁의 계기가 되려면 적절한 어젠다를 제시하고 건강한 사회 운동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유력 정치인의 성폭력 재판 1심 선고는 분노하는 대중의 목소리에 정면으로 어깃장을 놓은 형국이다. 판결에 대한 분노가 커지고 이런저런 논란이 거듭되고 있다. 온라인에는 대중의 분노가 일탈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분노하는 댓글이 넘쳐나고 막연한 혐오가 확산되고 있다. 불필요하게 가열된 성대결 양상은 대단히 파괴적이기까지 하다. 현행법의 테두리에서 처벌이 어렵다는 법원의 판단은 그대로 존중해야 한다. 그렇다고 판결을 그냥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분노하는 대중의 목소리를 적극 수용하고 합리적인 대안을 찾기 위한 공론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분노하는 대중의 목소리는 기대한 결과를 얻지 못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대중의 목소리는 일시적으로 줄어들 수 있어도 분노를 자아내는 현실의 모순이 해결되지 않는 한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이제는 정치가 국민의 분노에 답할 차례다. 이른 시일 내에 공론을 모으고 제도적 통로를 마련하여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 국민적 관심이 고조될 때 잠깐 논평을 내거나 즉흥적인 대책을 제시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부와 국회가 전문성을 확보하여 대중의 분노를 잠재우고 국민 통합을 이룰 수 있는 안목 높은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대구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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