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맹의 철학편지] 마르크스 탄생 200년 즈음, 소문에 휩쓸린 지식·익명 속 묻혀가는 의견·애정 없는 대화로 살지 않기를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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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9-14   |  발행일 2018-09-14 제39면   |  수정 2019-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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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올해는 마르크스(1818~83)가 태어난 지 200년이 되는 해야. 낡아서 이제는 잊힌 불온한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를 호명하지 않고는 현재의 우리의 삶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야. 그럼에도 아직까지 마르크스를 공식적으로 말하는 것이 낯설고 두려운 것은 우리의 분단 체제와 아직까지 살아있는 국가보안법, 시민의 레드 콤플렉스 등 때문일 거야. 물론 그 때문만은 아니야. 수년전 진보 정당에서 일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부터 ‘아직까지도 마르크스를 공부하느냐’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충격을 나는 잊지 못해. 마르크스만 알면 세상의 이치를 다 알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것도 웃기지만 마르크스를 경유하지 않고도 좀 더 나은 사회를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은 지적 나태와 편견이라고 나는 생각해.

해체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데리다(1930~2004)는 마르크스를 ‘유령들’로 불러들여. 그의 ‘마르크스의 유령들’(1993)이라는 책은 논쟁적이기도 하지만 예외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거야. 왜냐하면 그는 프랑스 68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적도 없었고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니었기 때문이지. 그리고 1993년은 이미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한 이후였고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물질화되고 있던 시점이었기 때문이지. 그럼에도 그가 ‘지금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유지하기’라는 ‘유령론’을 들고 나온 것은 앞서 내가 이야기한 것처럼 마르크스의 이론적 유산 없이는 누구도 역사적 자본주의, 즉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제대로 분석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들뢰즈(1925~95)도 자신이 택한 죽음으로 이루지 못했지만, 말년에 마르크스에 대한 책을 쓰려고 했다고 해. 아마 그도 데리다와 같은 정신적 빚을 마르크스에게 가지지 않았을까 추측해 봐. 물론 소수의 사람들에게 마르크스는 마음의 빚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나이든 사람들에게 마르크스는 악마화되어 있는 게 아닐까 해. 광복 이후 10월 항쟁과 제주 4·3 그리고 6·25전쟁 전후의 비극적 민간인 학살도 말하자면 어처구니없는 ‘퇴마’의 허울로 집행되었다고 볼 수 있겠지. 또한 학생시절이 유신과 군부독재시대였던 사람들에게 마르크스·엥겔스·레닌은 한 묶음으로 ‘빨갱이 괴수’였고 그들을 입 밖에 내는 일은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었지. 1960년대 이후 극단적 반공주의의 입장에서 서술한 마르크스레닌 비판서적 말고 자유주의자의 입장에서 쓴 마르크스 전기가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출판된 것은, 내 기억이 맞다면 1982년 번역 출간된 이사야 벌린의 ‘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가 처음일 거야. 서점에서 그 검붉은 표지의 책을 고를 때의 떨림이 생각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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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르크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 읽은 에리히 프롬(1900~80)의 책 때문이야. 마르크스주의에 뿌리를 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원이기도 한 프롬의 책, 특히 ‘소유나 존재냐’는 어린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지. 그에게 영향을 준 마르크스에게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던 것 같아. 철학과 학부에 들어갔을 때 당시 학교에서 칸트와 하르트만 철학의 대가이자 아니키즘에 깊이가 있으셨던 하기락 선생(1912~97)이 출판사 없이 복사실 편집본으로 만들었던 마르크스의 ‘도이치 이데올로기’ ‘경제학 철학 수고’를 처음 받아들었을 때의 감동도 기억나는구나.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때 그리고 지금, 마르크스를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 연구자들 혹은 이론가들 말고 대부분의 우리는 풍문으로만 마르크스를 이야기하고 호불호를 편 가르듯이 한 게 아닌가 해.

태형아, 그 어떤 이론도 이론 자체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철학사는 보여주고 있어. 200년 전에 태어난 한 사상가의 이론이 이론 자체의 위대성 때문에 기억되는 것은 아니야. 마르크스도 마찬가지겠지. 다만 데리다의 말처럼 우리가 마르크스를 유령들로 불러들이는 것,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마르크스가 유령들로 나타나는 것은 우리의 현실이 그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닐까? 물론 마르크스의 사상이 지금의 현실을 모두 설명해 줄 수는 없겠지. 그의 오류와 해결되지 않는 문제인 아포리아는 그의 말대로 이론과 해석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우리가 찾아가야 하겠지.

다만 마르크스가 태어난 200년 후, 나는 너에게 그가 가장 좋아했다는 말을 다시 해 주고 싶어. 첫 번째 편지에서 고대 로마의 테렌티우스라는 사람이 한 말이라고 너에게 전해준 바로 그 말이야. ‘나는 인간이다. 인간에 관계되는 것 가운데 나와 관계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Homo sum, humani nihil a me alienum puto).

소문에 휩쓸린 지식, 무리의 익명 속에 묻혀 가는 의견, 문제의 뿌리를 찾아가는 용기를 잃어버린 공부, 실천이 없는 공허한 해설, 인간에 대한 애정이 조금도 없는 대화 등등을 요즘 참 많이 접하게 돼. 태형이 너는 그들처럼 혹은 나처럼 공부하고 살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야. 하긴, 이것도 나의 ‘비겁한 변명’인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시인·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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