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영화, 음식을 캐스팅하다] ‘식객’과 육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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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9-14   |  발행일 2018-09-14 제40면   |  수정 2018-09-14
임금 울린 최고의 음식…조선 정기·민초들 기개 담은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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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식객’에 나오는 육개장


허영만 인기만화 영화로 만든 ‘식객’
최종결선 엔딩 장면 내놓은 육개장
망국에도 끝나지 않은 조선의 정신
소·고추기름·토란대, 강인함·생명력
목숨같은 재료인 최고품질의 소고기
순종에게 바친 탕의 맛‘재료의 미학’

큼지막하게 썬 사태·무·대파 대구식
잘게찢은 양지·토란대·고사리 서울식
잊지 못하는 정성가득한 어머니 육개장


연재를 요청받았다. 음식과 영화 이야기다. 영화평론가 손 끝에서 그려내는 음식이야기라면 뭔가 다를 것이라 기대한다. 음식 빠지는 영화가 있으랴마는 어느 영화에 어떤 음식이 나왔다는 정도를 쓰라고 나를 선택하지는 않았을 거란 얘기다. 영화는 삶을 반영하고 시대를 반영하며 인간의 욕망을 반영한다. 음식에는 만드는 이의 마음과 기운과 내면이 담긴다. 둘은 그래서 동색이다. 영화도 음식도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사람에 대한 애정이 빠진 음식과 영화는 맛없고 재미없다. 함께 나눌 이야기는 영화가 만난 음식, 음식을 캐스팅한 영화이야기다.

추석이면 내 어머니는 언제나 다른 집과 다른 탕국, 즉 육개장(어머니는 그것을 탕국이라 불렀다)을 끓였다. 나머지는 여느 집 같은 상차림이었다. 산적과 송편과 잡채와 갖은 나물이 상위에 올랐다. 넘치는 음식 가운데에서도 유독 맛있게 먹은 건 탕국이었다. 어머니의 음식을 먹고 자란 내게 생소한 음식은 아니었지만 한 번도 유래와 근본은 듣지 못했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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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개장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 ‘식객’.

2007년 10월, 허영만 화백의 인기 만화를 영화로 만든 ‘식객’의 언론시사가 열렸다. 음식을 매개로 욕망과 배신이 위트와 감동의 영역과 버무려지는 작품이다. 많은 사람 입에 오르내린 “세상의 모든 맛있는 음식은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수와 동일하다”는 명대사가 나오는 바로 그 영화다. 음식 보는 재미로 치자면 이보다 더 좋은 영화가 부지기수겠으나 한국음식,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탕국이 나왔다는 점에서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킨 보람을 느꼈다. 영화는 조선의 마지막 대령숙수 칼의 주인을 찾기 위한 요리경연을 그린다. 왕위 쟁탈전 같은 음모와 가족에 대한 뒷이야기가 물리며 진행되는 영화의 백미는 당연히 최종결선이다.

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은 나라 잃은 설움에 곡기를 끊는다. 그러나 대령숙수가 바친 소고기탕을 비우면서 눈물을 흘린다. 대령숙수가 임금께 올린 건 단순한 소고기탕이 아닌 망국에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조선의 정신이었다. 묵묵히 밭을 가는 소는 조선의 민초를 상징하고, 고추기름의 맵고 강한 맛에서 기세가 느껴지며, 병해충을 이겨내는 토란대는 외세에 굴복하지 않는 강인함을 보여주고, 고사리엔 들풀 같은 생명력이 담겨 있다. 숭엄한 재료미학과 민족혼을 담음으로써 임금을 울린 최고의 음식, 그것의 이름은 ‘육개장’이다. 112분 러닝타임 중 106분 동안 산해진미로 수놓던 영화가 엔딩에 가서야 마침내 진짜 주인공을 선보인 것이다. 그림과 텍스트로만 상상하던 장면의 실사재현. 영화가 다른 예술장르를 추월해 대중문화의 총아가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명절이면 어김없이 상에 오르던 그 음식이 조선의 정기와 민초의 기개를 담아 임금에게 올린 음식이었다니. 역사적 고증과 허구 사이를 종횡하는 이야기이지만 심금을 울리고 마음을 분기시키기에 충분하다.

최남선이 쓴 ‘조선상식문답’을 보면 “지방마다 유명한 음식은 어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구는 육개장”이라고 쓰여 있다. 육개장은 서울식과 대구식으로 나뉜다. 원조인 대구가 무와 대파를 넣는데 반해 서울식은 양지를 잘게 찢고 토란대와 고사리를 쓴다는 차이가 있다. 때문인지 혹자는 ‘식객’의 육개장은 서울식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 맞서 육개장은 대구식이 원조이니 ‘대구탕’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대구 토박이 다수는 육개장을 ‘대구탕’으로 기억하고 있다. 기억해보면 내 어머니가 끓인 육개장은 무와 대파를 큼지막하게 썰어 파 향이 그득했다. 영락없는 대구식이다. 서울식 대구탕도 나름의 맛이 있다. 학문의 경계마저 사라져 융합과 통섭의 시대에 서울식이면 어떻고 대구식이면 어떨라고.

영화에서 흥미로운 건 육개장을 받은 심사위원, 즉 음식전문가들 태도였다. 그들은 육개장을 “시골 장터에서나 파는 싸구려 음식”으로 폄한다. 평생 궁에서 진미만 먹고 산 임금이 이런 서민음식을 받았을 리 없다는 주장이다. 이에 감독은 대령숙수 칼을 돌려주러 온 일본인의 입을 빌려 곡기를 끊은 왕의 배와 마음을 에운 건 “육개장”이라는 답변을 내놓는다. 재료 각각에 담긴 의미에는 관심 없고 모든 걸 외형으로만 판단하는 세태를 거론한 것이다. 우리 음식을 얕잡아보며 역사적 가치마저 외국인을 통해 들어야했던 영화 속 환경은, 육개장의 원조이면서 기억과 추억에 의존해 명맥을 유지하는 대구식 육개장 식당들과 닮았다. 안타깝게도 육개장의 시작은 대구지만 원조의 의미를 상실한지 오래다. 심지어 육개장 프랜차이즈조차 타 지역에서 만들어졌다. ‘육대장’은 서울 마포에서, ‘홍익궁중전통육개장’은 인천에서, 또 ‘이화수육개장’은 서울 강남에서 첫 문을 열었다는 점은 시사적이다.

계명대 동산병원 근처 오래된 골목에 들어서면 소박한 간판 하나가 보인다. 유명한 육개장 전문식당이다. 70년된 노포이고, 몇 안 남은 진짜 대구식 육개장집이다. 큼지막한 사태고기와 대파와 무를 아낌없이 넣는 것이 어머니의 육개장을 꼭 닮았다. 1970년대에 유행했다가 이제는 사라진 타일 붙인 부뚜막이 건재하고, 연탄을 때던 부엌에 가스가 들어온 것 말고는 변한 게 없으니 그 역사와 고집이 찬란하다.

‘식객’에서 순종 임금이 먹었던 맛과 같은 육개장을 만드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재료는 최고품질의 소고기다. 주인공 성찬이 집에서 기르던 소에서 얻은 것이었다. 운암정에서 쫓겨나 서럽고 상처받은 마음에 정붙일 요량으로 키운 송아지. 긴 시간을 동고동락한 동생 같은 녀석이었다. 목숨 같은 내 전부를 내어주고 얻은 재료로 성찬은 최고의 육개장을 끓여냈고 대령숙수의 칼을 받는다.

명절이면 전날부터 새벽녘까지 고기와 채소를 삶고 데치면서도 고단한 줄 모르던 어머니의 모습이 선하다. 음식은 정성이고 기다림이라는 말은 그래서 참이다. 내 어머니의 대구식 육개장도 머리를 조아리게 만드는 맛이었다.

(영화평론가, 한국능률협회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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