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쫓고 쫓기던 사냥터의 공룡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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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9-21   |  발행일 2018-09-21 제36면   |  수정 2018-09-21
■전남 화순 서유리 공룡발자국 화석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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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표면은 공룡 발자국의 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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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서유리 공룡발자국 화석산지. 1천800여 개의 공룡 발자국이 백악기 후기의 퇴적층에서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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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의 안내판. 미니 티라노사우루스가 공룡의 땅을 예고한다.

스치며 슥슥 바라보는 풍경이지만 어느 한 곳을 고즈넉이 바라보는 느낌이다. 창밖이 온통 들과 산이어서. 길은 백아로, 아마도 백아산(白鵝山)에서 온 이름일 것이다. 석회석으로 된 산봉우리가 마치 흰 거위들이 모여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산이다. 산이 있을 법한 들 저편의 동쪽을 바라보지만 산봉우리의 거위들은 보이지 않는다. 뒤뚱뒤뚱 거위처럼 느긋하게 달린다. 예상치 못할 것 없는 시골길, 아, 이건 예상치 못했다. 거대한 공룡 두 마리가 길가에 서 있다. 무성한 가로수 아래로 허리를 굽혀 들여다본다. 너른 주차장 너머 ‘아쿠아나’라는 이름이 보인다. 100% 온천수로 채워진 물놀이장이란다. 공룡 발자국을 보러 가는 길에 공룡을 먼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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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긴 대형 초식공룡인 용각류의 둥근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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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공룡인 수각류의 발자국 행렬


가로60m 세로54m 커다란 퇴적암 단면
1억년 전 호수 언저리 평원 ‘공룡의 땅’
5개지층서 1800개 발자국·73개 보행렬
대부분 두다리로 걷고 지능 높은 잡식성
초식보다 육식공룡 흔적 타지역 압도
가속도 내어 달려간 정황 세계 첫 보고
풍화·침식 덧칠하며 희미해져간 화석


◆공룡 발자국 화석 산지

배롱나무 꽃 피어난 길가에 서유리(西酉里) 공룡발자국화석산지 안내판이 서 있다. 안내판 위에 미니 티라노사우루스가 이빨을 드러낸다. 주차장을 가로질러 완만한 기울기의 길을 오른다. 길섶에 퇴적암의 단면이 드러나 있다. 다양한 색깔과 두께의 층들이 촘촘하게 쌓여 하나의 암석으로 굳어진 모습은 언제나 경이롭다. 공룡과 공룡발자국 화석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설명을 슬쩍 읽은 뒤 저 앞에 펼쳐져 있는 너른 암석면으로 시선을 옮긴다.

드러나 있는 것은 가로 60m, 세로 54m, 두께가 30m에 달하는 커다란 퇴적층이다. 관찰 데크가 울타리처럼 빙그르르 둘러쳐져 있다. 군데군데 각 지점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룡발자국 화석에 대한 정보가 부착돼 있다. 현재까지 5개의 지층에서 1천800여 개의 공룡 발자국과 73개의 보행렬이 확인됐다고 한다. 대부분은 두 다리로 걷고 비교적 지능이 높은 육식 혹은 잡식성 공룡인 수각류(獸脚類)의 것이다. 또한 체격이 크고 네 다리로 걸었던 초식 또는 잡식성 공룡인 용각류(龍脚類)의 발자국도 있다.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뚫어지게 바라봐도 절망적이다.

이곳은 원래 채석장이었다고 한다. 1999년 5월 전남대 한국공룡연구센터가 화순 온천지구를 답사하는 과정에서 발견했다. 역시 전문가들의 눈은 다르다. 전남에서 공룡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곳은 주로 해남·보성 등의 해안지역이다. 전남 내륙에서 발견되기는 이곳이 처음이다. 초식공룡의 흔적이 대부분인 다른 지역과 달리 육식공룡 발자국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특별하다. 그 외에 나무화석과 식물화석 등도 발견되었다고 하나 이곳에서 직접 확인되지는 않는다.

◆호숫가의 공룡들

현장에서 가장 신나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연흔(漣痕)과 건열(乾裂)이다. 건열은 진흙과 같은 점토질의 땅이 마르면서 쩍쩍 갈라진 자리에 모래가 쌓인 것이다. 연흔은 물결의 흔적이다. 이를 다른 말로 기적이라 하겠다. 물결이라니.

약 1억년 전인 중생대 백악기 후반 이곳은 호수 언저리의 평원이었다. 날씨는 따뜻했고 식물은 풍부했으며 공룡이 활보하는 땅이었다. 한반도는 백악기 초부터 지각변동으로 몸부림쳤고 격렬한 화산활동에 흔들렸다. 그때 광주를 포함한 땅에 지름 약 40㎞의 둥근 함몰지가 생겼다. 능주 분지다. 화순군의 오랜 중심지였던 능주면 소재지가 분지의 중심이어서 생긴 이름이다. 호수는 그 분지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공룡이 얕은 호수와 평원을 활보하는 동안 모래와 진흙이 호수로 흘러들어와 쌓였다. 동시에 주위의 화산이 토해내는 용암과 재에 뒤덮였다. 공룡의 발자국은 이때 퇴적층 속에 갇혔다. 연흔은 그때의 물결, 건열은 그때의 태양이다. 그리고 마침내 격렬한 화산활동으로 호수는 메워졌다. 그 이후에는 퇴적층은 물론이고 공룡발자국 화석은 발견되지 않는다. 호수가 사라지면서 공룡도 사라진 것으로 여겨진다. 관찰 데크에서 뒤돌아보면 들이다. 이곳이 호수의 언저리였다면 저들은 호수였을까.

◆달려, 공룡!

호숫가를 빠른 걸음으로 걷던 커다란 육식공룡이 갑자기 달리기 시작한다. 작은 공룡들이 사방으로 도망친다. 달려! 큰 공룡은 가속도를 내 최고속도에 이른 뒤 속력을 늦춘다. 그의 강력한 턱뼈에는 작은 공룡이 물려 있다. 이것은 가설이다. 한 연구자는 이곳에 있는 특별한 발자국이 육식공룡끼리의 사냥 장면이라고 추론한다. 그렇다면 사냥은 성공이다.

공룡 발자국의 보행렬에 나타나는 보폭은 공룡의 골반까지 길이와 보행 속도까지 알려준다고 한다. 보폭이 늘어나는 것은 공룡이 속도를 내 달린 것이다. 그 앞쪽에 소형 수각류들의 걸음이 방사상으로 흩어져 찍혀 있는 것은 추격을 피해 달아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공룡이 에너지를 많이 써가며 속도를 높였다면 먹이를 추격하는 특별한 정황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이곳은 공룡이 가속도를 내 달려갔던 흔적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보고된 곳이기도 하다.

시간은 흐른다. 발견 당시 선명했던 공룡 발자국은 이후 풍화와 침식으로 많이 희미해졌다. 산지 앞마당에 화석 모형들이 전시돼 있다. 그것들은 공룡의 시대를, 가깝게는 발견 초기의 모습을 상상하는 데 도움이 된다. 현재는 훼손상태가 심해 보호막을 설치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사실 계획되었던 공사 기간은 지났고 공사는 잠시 중단된 상황인데 내년 상반기에는 완료될 거라고 한다. 서유리의 공룡발자국 화석산지는 2007년 천연기념물 제487호로 지정됐다. 또한 이곳은 올해 4월에 승인된 무등산권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속해 있다. 깨어진 것은 파편을 모아 붙이면 되지만 바람과 빗물이 가져간 것은 되찾아 올 수 없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정보

88고속도로를 타고 광주 방향으로 간다. 순창IC에서 내려 27번 국도를 타고 곡성·화순 방향으로 간다. 곡성 옥과의 평장삼거리에서 우회전, 연화삼거리에서 좌회전해 15번 국도를 타고 계속 직진하다 원리네거리에서 우회전해 887번 지방도인 백아로를 6㎞ 정도 가면 우측에 서유리 공룡발자국 화석산지가 있다.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다. 안내소는 월요일 휴무이나 관람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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