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영의 마음 톡톡] 日 영화 ‘어느 가족’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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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9-21   |  발행일 2018-09-21 제39면   |  수정 2018-09-21
추석 즈음, 아픔·상처 보듬어 주는 가족의 힘
2018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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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가족이란 말을 골똘히 들여다보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어느 가족’을 보고 나서다. 가족은 인간의 삶이 시작하는 곳이며 인생의 대부분을 서로 의존하며 사는 소중한 공동체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 정상적인 가족은 그 기능을 잃어가고 가족의 테두리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다. 가족은 진정성보다 생존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가족이란 개념도 변화하는구나 싶다.

‘어느 가족’은 가족의 해체를 다룬 기존 영화와 달리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이루며 살아가는 모습을 담아냈다. 일상적인 가족이라는 이면에 숨겨진 모순과 부조리에 질문을 던지며 그 속에 숨어 있는 잔혹함을 영화는 놓치지 않고 잡아낸다. 이 영화는 일본의 외진 재개발 지역 오래된 목조 민가에서 6명이 모여 한 가족을 이루며 살아가는 이야기다. 혈연을 뛰어넘는 가족. 그들은 내일의 희망을 기대하지 않으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6명이 어떤 이유로 모여 살게 되었는지는 영화에서 말해 주지 않지만 영화의 흐름으로 감지할 뿐이다.

‘피붙이가 아닌 사람들이 이룬 공공체가 가족이 될 수 있는가’하는 물음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이 가족은 할머니(하츠에)와 일용직을 하는 아빠(오사무), 세탁 공장에서 일하는 엄마(노부요), 고모(아키), 어린 소타가 좁은 집에 모여 산다. 모두가 이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이다. 할머니는 남편의 사망신고를 하지 않고 그 연금을 받아 산다. 아키는 죽은 남편(다른 여자 사이)의 아들의 딸이다. 노부요와 오사무는 교도소를 드나든 전력이 있고 쇼타와 유리도 부모에게서 소외된 아이들이다.


각자 사연 속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
피붙이 아니지만 6명이 모여 한공동체
풍족하지는 않아도 함께 살며 행복감
혈연 뛰어넘는 유대감으로 이룬 가족

가족기능 상실·해체돼가는 현대시대
따뜻한 말한마디로 서로 위로해 줄때



이들은 궁색한 살림에 필요한 물품은 슈퍼에서 좀도둑질을 해서 충당한다. 어느 날 슈퍼에서 아빠는 망을 보고 쇼타는 몰래 가방에 물건을 담아 집으로 오다가 추위에 떨고 있는 대여섯 살 여자 아이(유리)를 발견해 집으로 데려온다. 아이도 물건을 슬쩍 가져온 것처럼 아무 가책없이 데리고 와 그렇게 가족을 이루고 산다.

이 가족들의 삶에 깊이 들어갈수록 현실의 가족들이 놓치고 있는 것을 조용히 말없이 보여준다. 풍족한 물질이 없더라도 한 공간에 모여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나름대로 행복해 보인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시각으로 보면 저들은 좀도둑질을 일삼는 사람이니 행복하면 안된다는 심리가 저변에 깔려 있다. 그러나 그것을 뒤집어 그들에게도 보통의 가족처럼 행복한 순간이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를 위로하며 공동체로서 가족의 형태를 유지하는데 할머니 하츠에는 야뇨증이 있는 유리에게 손을 잡고 소금을 뿌리고, 노부요는 자기와 같은 화상 자국을 손으로 쓰다듬어 주는 것으로 유대관계를 형성하면서 유리의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도 보여준다. 구멍가게에서 쇼타는 유리와 물건을 훔치다가 할아버지의 훈계를 듣는다. 쇼타를 불러 물건을 훔치기 전에 의식 같은 검지손가락을 돌돌 돌리고 손을 이마와 입에 가져가는 동작을 하며 여동생에게는 “이런 거 시키지 마”라고 한다. 구멍가게 할아버지는 그동안 알고도 모른 척 했던 것이다. 그 말은 어린 쇼타의 가치관에 혼란을 가져온다.

할머니의 죽음과 쇼타의 성장은 이 가족이 붕괴하는 계기가 된다. 할머니의 연금으로 살아온 이들은 할머니의 사망 신고를 하지 않고 할머니를 마루 밑에 구덩이를 파고 암매장한다. 점점 커가는 쇼타는 물건을 훔치는 행위가 올바른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가족의 끈을 놓아 버린다. 모든 책임을 노부요가 지고 교도소에 수감된다. 경찰이 아이들이 당신에게 뭐라 불렀느냐는 말에 노부요는 눈물을 흘린다. 엄마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불러도 상관없다고 여겼지만 경찰의 질문이 노부요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교도소에 면회를 간 쇼타에게 노부요는 어디에서 데려왔는지 알려주며 친부모 찾아가기를 바란다.

제 집으로 돌아간 유리도 친엄마가 가까이 오라 손짓할 때 고개를 저어 안가겠다는 의사 표현을 한다. 유리는 자식을 때리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노부요를 통해 알았기 때문이다. 오사무는 쇼타를 버스정류장에 바래다주고 버스가 떠나자 쇼타를 부르며 버스 따라 한참을 달린다. 뒤를 돌아보다가 쇼타는 “아빠”라고 입속말을 한다. 그리고 할머니도 해수욕장에 가족이 소풍을 갔을 때 모래사장에 혼자 앉아 저들을 바라보며 “고맙다”는 말을 한다. 쇼타의 “아빠”라는 말과 할머니의 “고맙다”는 말은 아무도 듣지 못했지만 울림이 컸다.

쇼타는 누구보다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와 길러준 아버지를 모두 뒤로하고 청소년보육시설에서 새로운 삶을 산다. 학교도 가고 친구도 사귀면서 사회 안으로 발을 들여놓고 있다. 스스로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쇼타. 쇼타와 유리는 가족이라는 것 너머를 알아버렸다. 유리가 집 앞에서 혼자 놀다가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리며 저 너머를 바라보는 것이 기억에 남는다. 너머를 알아버렸기 때문에 어쩌면 더 성숙한 어른으로 잘 성장하리라.

‘어느 가족’을 보고 오는 길에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유리만 할 때 이불에 오줌을 쌌다. 그때 엄마는 키(곡식 따위를 까부르는 기구)와 바가지를 내놓으며 키를 머리에 쓰고 옆집에 가서 바가지에 소금을 얻어 오라고 대문 밖으로 쫓아냈다. 키를 머리에 쓰고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대문 앞에 처연히 한참 앉아 있었다. 소금을 옆집에서 얻어왔는지는 기억에 없다. 엄마가 화를 냈고 “니 진짜 엄마는 화양장터에 가면 있을 끼다”며 막내고모는 놀렸다. 엄마의 성화보다 고모의 말에 몹시도 서러워서 울다 잠들었다. 그후 나는 여기 맡겨져 있고 언젠가 친엄마가 나를 데리러 올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간혹 하곤 했다. 가끔 화양이 어디 있는지 화양을 찾아 가고 싶었다. 우습게도 이 생각은 사춘기 내내 따라다녀 내 의식에 굳은살처럼 박혀 있었다. 장난이지만 입에서 뱉어낸 말이 그렇게 중요하다. 평생 가슴에 못을 박아 놓을 수도 있다.

할머니 하츠에는 자신이 누리지 못한 가정을 이런 유사가족으로라도 꾸리고 싶었나 보다. 며칠 후면 추석행렬이 고향으로 이어진다. 상처를 주는 것도 상처를 받는 것도 가까운 가족에게서 가장 많다고 한다. 온 가족이 모이는 즐거운 명절에 가족이기 때문에 더욱 말을 아끼고 조심해야겠다.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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