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영남일보로 보는 인물열전’ .18·<끝>] 이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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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9-27   |  발행일 2018-09-27 제29면   |  수정 2018-09-27
영남일보 사장 취임 후 사업영역 확대 등 ‘변화의 바람’
각계 권위자 초청 매월 두차례 강좌
1957년에는 시민대운동회 부활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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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 발행인이었던 이순희는 1958년 5월에 실시된 민의원 선거에 나서 당선됐으나 그 후 선거법 위반으로 당선무효가 됐다. <영남일보 1958년 5월7일자>

‘저가 감히 이런 뜻을 가지게 된 동기는 저가 대구의 태생으로서 10여 년간 대과없이 지냈음은 전혀 대구사회의 여러분이 아껴주시는 덕분이었음에 미력이나마 대구사회를 위한 응분의 사업을 했으면 하는 생각만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만드신 영남일보를 더욱 견고히 할 필요가 있기로 본인 자신 덕을 위함 보단 지금 정신은 (영남)일보를 살리겠다는 마음으로 ~’

영남일보 1956년 7월8일자 이순희 사장의 취임사다. 그는 대구에서 나고 자란 자신이 지역사회에 이바지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영남일보를 굳고 단단하게 만드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는 사장 취임 후 일정 부분 변화와 활기를 불어넣었다. 영남일보는 동인제로 출발한 신문사였다. 그러다보니 안정적인 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 후 주식회사로 바꿨으나 기구 개편이 잦은데서 보듯 자금 사정이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사장에 취임한 뒤 자금 조달을 통해 사업영역을 확대하고 신문 위상을 갖추는데 힘을 기울였다. 취임 이듬해인 1957년에는 시민대운동회를 부활하는 등 다양한 사업을 펼쳤다. 시민대운동회는 자금이 부족해 한 해 전에 중단된 사업이었다. 또 문화 전반에 걸친 각계의 권위자를 초청해 영남문화강좌를 매월 2회씩 열었다. 영남일보 직영의 통신지사 시설을 확장하는 한편 지면도 매일 4면을 발행했다.

하지만 이 같은 신문사의 활력은 머지않아 멈칫한다. 그가 1958년 5월에 실시된 제4대 민의원 선거에 나섰기 때문이다. 대구에서 집권여당인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지만 그 후 선거자금 등 선거법 위반 사실이 불거졌다. 결국 대법원에서 당선무효 판결을 받았다. 이로 인해 신문사의 운영이 다시 어려움 속으로 빠져들기도 했다.

‘~그리고 이 조국애와 향토애는 세구연천 설혹 상해(상전벽해)의 변이 있다손하더라도 이 생명이 이 조국의 땅에 존속하는 한 결코 변함이 없으리라고 외람스럽게도 확신함을 관용하시면 하나이다 ~’

그는 당선무효가 되자 영남일보 1958년 8월4일자에 ‘대구 기구(己區) 인사에게 드림’이라는 글을 썼다. 선거과정에서 일어난 상황을 담아 해명과 반성을 하고 있다. 그는 선거로 인해 곤욕을 치른 경험이 이미 한 차례 있었다. 1949년 1월 안동 을구 보선에 당시 상공부 장관으로 입각해 있었던 임영신이 출마했다. 선거 과정에서 임영신은 적산기업으로부터 선거자금을 받는 등 불법행위를 저질렀다. 그 적산기업 가운데 하나가 조선방직 대구메리야스 공장이었다. 당시 공장의 대표였던 그는 이 사건으로 구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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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금번에 표창을 받는 공장은 일제 시에 비하여 제품이 우수하고 생산능률이 증가되고 공장 자체의 관리가 향상된 다음의 네(곳) 공장이며 그는 남조선 각 지구에서 우수공장으로 추천된 오십여 공장에서 선발된 것이라 한다. 조선기공 영등포적산 공구관리인 이만길, 중앙도자기 인천도자기 대표 박재중, 조선방직 대구공장 적산 관리인 이순희 ~’

미군정의 상무국이 평가한 우수공장 표창을 알리는 부녀일보 1947년 9월26일자 기사다. 표창 명단에 든 조선방직 대구공장은 메리야스 공장이었다. 그곳의 공장장이자 적산관리인은 이순희였다. 광복 직후 남조선의 산업 기반은 엉망이었다. 기술이 뒤떨어진 데다 열등한 생산시설로 태반이 휴업상태에 빠졌다. 그나마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관리자의 몫이 컸다. 그는 경영수완을 평가받아 우수관리자로 선정되었던 것이다.

그는 기업인이었다. 대구메리야스 공장의 관리인, 공장장, 대표 등을 지내며 내외방직으로 키웠다. 그러면서도 신문에 관심이 많았다. 1950년에 남선경제신문의 취체역(현재의 이사)으로 선임된 것은 이를 말해준다. 그는 영남일보 사장을 맡아 신문사의 기틀을 다지는 역할을 했다. 덤으로 언론인의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점도 일깨워줬다.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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