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의 고장 청송 .18] 청백리로 존경받은 청송부사 정붕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구글플러스
  • 기사내보내기
  • 박관영기자
  • 2018-10-10
  •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사냥에 몰두하던 연산군에 직간하다 장형 40대 맞은 청백리

청송군 청송읍 월막리 소헌공원에 자리한 운봉관. 조선시대 청송도호부의 객사로 세종 10년인 1428년 지어졌다. 신당 정붕은 청송도호부 부사로 3년간 재임하며 청백리의 모범을 보였다.
소헌공원 입구에는 ‘시 한수 교훈 한 말씀’이라 표기된 ‘스토리 보드’가 세워져 있다. 스토리 보드에는 잣과 꿀을 보내 달라는 성희안의 부탁을 거절한 청송부사 정붕의 일화가 적혀 있다.
청백리. 그는 연산군 시대 청렴하고 강직한 성격으로 원칙을 가장 중시했던 청백리였다. 키가 8척이나 되는 거구였고 커다란 얼굴에는 위엄이 있었다고 한다. 실록에는 배포가 크고, 학식이 높으며, 겉으로는 활달하나 속으로는 견고하고, 자신의 의견만을 내세우지 않아 사람들에게 거슬림이 없는 인물이었다고 전한다. 그는 신당(新堂) 정붕(鄭鵬)이다.

세조 13년 선산 신당포서 태어나
22세 진사시 합격 28세 문과 급제
홍문관 교리 등 청요직 두루 역임

무오사화 주도 처고모부 유자광에
처가 쌀 빌리자 상 물리고 돌려보내
갑자사화 때는 영덕으로 귀양길

중종 반정 후 심장병 핑계로 낙향
임금이 수차례 벼슬 내렸지만 사양
1509년에야 청송부사로 선정 펼쳐


#1. 가문의 옥수(玉樹) 정붕

정붕은 세조 13년인 1467년 선산의 신당포(新堂浦)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운정(雲程), 호는 신당이다. 아버지는 현감 정철견(鄭鐵堅), 어머니는 의령옥씨(宜寧玉氏) 생원 옥형종(玉荊宗)의 딸이었다. 정철견은 정직하고 학식이 깊은 재야의 학자로 인천부사 정미수(鄭眉壽)와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 등의 천거로 관직에 나아간 인물이다. 성종실록에 따르면 ‘정철견은 정직하고 지조가 있으며 시골구석에 머물러 있지만 학문을 궁구하고 덕을 기르며 스스로 수양하여 나이가 60이 넘었어도 기력이 오히려 건장하며 그 재능과 행실이 임용(任用)하여도 감당할 만하다’고 되어 있다. 정붕은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아 스스로 재야의 학자로 종신하는 데 뜻을 두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정붕은 성격이 활달하고 구속받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러나 늘 절개와 지조가 있다는 평을 들으며 자랐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가학을 계승하였고 성장하면서는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과 대학을 배웠다. 그의 공부는 매우 집요하고 철저했으며 배운 것을 실천하는 데 게으른 법이 없었다. 그의 뛰어난 자질을 일찍이 알아본 이는 숙부 정석견(鄭錫堅)으로 김종직(金宗直)이 군자다운 사람이라 칭찬하였던 선비다. 그는 조카 정붕을 ‘우리 가문의 옥수(玉樹)’라고 말하며 큰 그릇이 될 것이라 예견했다. 그리고 김굉필의 문하에서 학문의 바탕을 익힌 정붕을 서울로 데리고 와 교육시켰다.

정붕은 성리학 탐구에 매진하면서도 과거에는 뜻이 없었다. 당시 정붕은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과 벗하였는데, 젊은 그들은 광대한 천지를 자유롭게 다니고 싶어 했다. 이에 정석견은 엄하게 꾸짖어 과거를 보게 했다. 정붕은 22세인 1486년(성종 17)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28세 때인 1492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성종은 문신 가운데 조심스러우면서도 치밀한 인재를 뽑아 천문과 산학(算學)을 익히게 하였는데 정붕이 추천되었다. 관직에 있는 동안 정붕은 홍문관 교리와 수찬, 사헌부 지평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했다.

#2. 청렴과 강직의 청백리

정붕의 스승 김굉필은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김숙자(金叔滋),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영남 사림파의 성리학적 정통을 계승한 인물이다. 그는 특히 성리학의 실천철학인 도학(道學)을 중시했는데, 이는 몸과 마음을 닦는 수양으로서의 도덕과 예(禮)를 강조한 것이었다. 김굉필의 적통인 정붕 역시 모든 인간이 자기 수양을 통해 인륜과 의리를 구현하고, 이를 바탕으로 도덕 국가를 건설하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학정치를 실천하고자 했다. 그는 청렴하고 강직한 성격으로 원칙을 가장 중요시했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엄격성을 가지고 있었다.

1494년 연산군이 왕위에 올랐다. 군주의 바른 마음과 성실한 자세를 강조했던 사림은 연산군시대에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다. 그 첫 번째가 1498년의 무오사화다. 사림파의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었고 사림의 영수 김종직이 부관참시(剖棺斬屍) 되었다. 무오사화를 주도한 이는 유자광(柳子光)이다. 그는 정붕의 처고모부였다. 정붕은 훈구대신인 유자광과 거리를 두었지만 새해마다 종을 보내 문안하는 예절만은 폐하지 않았다. 그는 종을 유자광의 집에 보낼 때마다 삼노끈으로 팔을 단단히 묶어 보냈다가 돌아오면 풀어주었다. 유자광의 집에 오래 머무르지 말라는 당부이자 압박이었다. 관직에 있었으나 정붕의 생활은 늘 곤궁했다. 며칠이 멀다하고 양식이 떨어졌고 그때마다 부인은 비지죽을 끓였다. 어느 날 밥상에 올라온 흰 밥이 유자광에게 꾸어 온 것임을 안 그는 상을 물리고 벗에게 쌀을 빌려 유자광에게 돌려보냈다. 유자광은 이 같은 정붕의 태도에 불만이 깊었다.

연산군 10년인 1504년, 정붕은 홍문관 교리였다. 그는 놀이와 여자를 좋아하고 매사냥꾼을 모아 사냥에 몰두한 연산군에게 직간했다. “천금(薦禽, 새로 잡은 날짐승의 고기를 종묘에 먼저 올리는 것)을 이미 했으니 잦은 사냥은 제왕의 도리가 아니므로 중지해야 한다.” 이 일로 정붕은 장형 40대를 맞았다. 그해 사림은 다시 위기를 맞는다. 갑자사화다. 스승 김굉필이 효수되었고 정붕은 영덕으로 유배되었다. 귀양 가는 정붕에게 유자광은 독약 주머니를 보냈다. “이번 걸음에 아마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것을 가지고 자처(自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정붕은 독약을 간직했다. 그리고 훗날 유자광의 귀양길에 독약 주머니를 전했다. “이 물건은 전일에 나에게 준 것인데, 귀양 가는데 필요할 것이므로 지금 돌려준다.”

#3. 청송부사 정붕

1506년, 중종반정으로 세상이 바뀌었고 정붕은 복직되었다. 대궐에 든 정붕은 옥당 뜰에서 홍경주(洪景住)와 마주쳤다. 정붕은 공신으로 갑자기 고위관직에 오른 그를 보고 경악했다. 또한 그의 얼굴에서 장차 큰 사건을 일으킬 인물임을 직감했다. 결국 정붕은 심장병이 도졌다는 핑계를 대고는 낙향해 버렸다. (훗날 홍경주는 기묘사화를 일으킨다.) 정승 성희안(成希顔)은 임금에게 ‘정붕은 순정(淳正)한 선비입니다. 성명(聖明)한 세대에 그를 오래도록 초야에 버려둘 수 없다’고 하였다. 중종은 ‘초야에서 밭 갈던 이와 동해에서 고기 낚던 이가 도덕을 간직하고 어부와 초부 사이에 섞여 있었구나’ 하였다. 임금은 정붕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오기 위해 친히 말을 내려 보내는 등 정성을 다했다. 그리고 검상(檢詳), 교리(校理), 사성(司成) 등 누차 벼슬을 내렸으나 정붕은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마침내 정붕이 벼슬을 받든 것은 1509년이다. 정붕은 풍광이 수려하고 업무가 적은 청송부사에 제수되었다. 성희안은 정붕에게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편지 말미에 ‘청송이 깊은 산골이라 잣과 꿀이 많을 것이니 좀 보내달라’고 부탁하였다. 당시 지방의 특산물을 중앙의 높은 관리에게 선물하는 일은 관행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정붕은 답장을 썼다. “잣은 높은 산 위에 있고 꿀은 백성 집 벌통 속에 있으니, 내가 부사라 한들 어찌 구할 수 있겠습니까.” 재상의 청탁이 민생을 해친다고 판단하여 거절한 것이었다. 글은 부드러우나 날카로웠다. 답장을 접한 성희안은 부끄러워하며 곧바로 정중한 사과의 편지를 써 보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이후 청송 고을의 원님이 되어 가는 이들에게 늘 귀감처럼 전해졌다.

정붕은 청송부사로 3년간 재임했다. 그 사이 수차례 사직하였지만 임금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타고나고 갈고닦은 성정대로 청송 고을을 잘 다스렸다 전한다. 그리고 1512년 9월19일 관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46세였다. 그의 임종 시 공중에서 갑자기 음악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가 신선이 되었을 거라고 했다. 집이 빈한하여 장사 지내는 것도 어려웠다. 벗들이 모여 돕기를 의논하였고 풍기군수 임제광(林霽光)이 비석을 맡아 건립하였다.

생전 정붕은 책상 앞에 ‘안상도(案上圖)’를 붙여 놓고 아침저녁으로 보았다 한다. 안상도는 유학이 추구하는 핵심 이념과 그에 따른 확고한 원칙을 체계화한 실천 지침이었다. 훗날 퇴계 이황은 ‘학문의 정수를 알려면 마땅히 신당의 안상도를 보라’고 하였다. 길이 아니면 가지 않았고 원칙이 아니면 행하지 않는 것, 한 사람의 바른 처신은 긴 그림자를 남긴다. 청백리 정붕의 그림자는 오늘날까지 드리워져 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해주정씨 대종친회. 차장섭, 신당 정붕의 생애와 정치 사상적 역할, 국학연구, 2013. 디지털청송문화대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조선왕조실록.

[Copyrights ⓒ 영남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