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까머리 피란살이…나의 문학 자양분이 된 대구는 제2의 고향”

  • 백승운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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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0-11   |  발행일 2018-10-11 제29면   |  수정 2018-10-11
66년만에 대구 찾은 ‘의사 시인’ 마종기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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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시인이 부인과 함께 영남일보를 방문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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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7일 영남일보를 방문한 마종기 시인. 66년만에 대구를 찾은 그는 6·25전쟁 당시 피란시절의 이야기와 아버지 마해송에 대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손동욱기자dingdong@yeongnam.com

옛집의 부재와 적막 앞에 팔순의 시인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들숨은 거칠었고 날숨은 불규칙했다. 늦은 귀향이 무례한 일이라 생각했지만, 내심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길 모퉁이를 돌아서면 옛집이 그대로 서 있을 것만 같았다. 담벼락 너머 고개 돌리면 옛 얼굴들이 골목 한편에서 웃음지을 줄 알았다. 하지만 부재와 적막뿐이었다. 생경한 원룸촌과 빌딩들, 낯선 이방의 도시만 덩그렇게 서 있을 뿐이었다. 추억이라 위로하기엔 서운하고 아쉽고 공허했다. 눈물 두 줄기 실없이 비처럼 뿌리지는 않았지만, 시인은 속으로 울음을 삼키는 듯했다.

시인 마종기. 연세대 의대 본과 1학년이던 1959년, 시인 박두진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등단한 그는 ‘의사 시인’으로 더 친숙하다.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그가 지난달 17일 66년 만에 대구를 찾았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까까머리 중학생이던 그는 이듬해 휴전이 되어 서울로 떠나기 전까지 대구에서 피란살이를 했다. 대구는 시인 마종기에게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다. 그는 이날 피란시절 살았던 대구 중구 제일교회(현 대구제일교회 기독교역사관) 건너편 옛집과 아동문학가인 아버지 마해송의 사무실이 있던 서문로 영남일보, 그리고 자신이 다녔던 중구 남산동 피란학교 옛터를 방문했다.

“너무 많이 변해서 아쉽습니다.” 짧은 소감 속에는 서운함이 깊게 배어 있었다. 표정은 담담했지만 그의 눈동자는 가볍게 흔들렸다. 시인에게 대구는 전쟁통의 혼란과 아버지에 대한 애증, 그리고 유년의 기억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있는 존재였다. 물리적인 성장통과 더불어 문학적 성장기를 보낸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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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시인은 6·25전쟁 당시 피란시절 영남일보 학생문예란에 자작시를 자주 발표했다. 1952년 5월24일자 영남일보에 게재된 ‘동화사 가는길’은 그의 첫 시집에 실려 있다.

세든 집 책가게 들어가 무작정 읽어
대구서 창간 학생잡지‘학원’투고
문학상 연속 3회 수상하자 명성 얻어

선친은 우리나라 아동문학의 선구자
여러 신문사 사장 제안 등 손사래
오로지 글 쓰는 일에만 전념 청빈생활
사무실 있던 영남일보 드나들며
구상·조지훈 등 문인들과 활발한 교류

영남일보에 동시 6편 잇따라 발표
어릴 때부터 재능 발휘 작가의 꿈 키워
전쟁 중에 영남일보 대단한 영향력
동생과 신문 팔던 생생한 기억 회상도


◆글쓰기의 토대가 된 대구

“제일교회 건너편에 책방이 하나 있었습니다. 대구에 피란 와서 책방이 있던 그 집에 세들어 살았죠. 단칸방이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 3남매 그렇게 다섯 식구가 누우면 꽉 들어찼던 방이었습니다. 아침은커녕 점심도 못 먹던 가난한 시절이었죠. 점심때가 되면 밥 생각이 나지 않을, 다른 일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다 책방에 들어가 무작정 책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밥 생각이 안 나더군요. 시간만 나면 책을 봤죠. 그때 책을 읽으면서 ‘글쓰는 사람이 되고싶다’는 생각을 처음 했던 것 같습니다”.

시인에게 대구는 글을 쓰는 토대를 마련해 준 곳이었다. 문학의 모성적 자양분을 공급해준 곳이 대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문학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대구 피란시절이 글쓰기의 바탕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대구에서 창간한 중·고등학생 잡지 ‘학원’은 문인의 길로 접어든 밑거름이었죠. ‘학원’ 잡지에서 학원문학상을 제정해서 상을 주었는데, 중3·고1·고2 때 연속으로 받았습니다. 문학상을 3회 연속 받아서 제가 굉장히 유명해졌습니다. 휴전되고 서울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였는데, 한번은 훈육주임한테 불려 간 적이 있었죠. 훈육주임이 대뜸 ‘야, 이게 다 너한테 온 편지야’하면서 큰 쓰레기통에 수북하게 담긴 팬레터를 보여줬습니다.”

중·고등학생 잡지 ‘학원’은 1952년 10월 대구 삼덕동 29번지에서 창간됐다. 전란 속에서 청소년들에게 배움과 희망을 주기 위해 ‘출판계의 거장’ 김익달이 창간한 잡지였다. 연재물 중 정비석의 ‘홍길동전’과 김용환의 ‘코주부 삼국지’는 단연 인기였다. 대구는 물론 전국의 학생들은 매월 학원이 발행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고, 학원을 읽지 않으면 학생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는 말까지 떠돌 정도였다. 특히 학원이 제정한 ‘학원 문학상’은 창작과 향유에 대한 학생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준 ‘실천의 장(場)’이었다. 시인 마종기를 비롯해 김원일 문정희 박동규 이청준 조세희 최명희 황동규 황석영 황지우 이성부 이승훈 윤후명 정호승 안도현 등 수많은 문인들이 학원문학상을 통해 배출됐다.

◆아버지 마해송

시인의 아버지는 아동문학가 마해송이다. 마해송은 1923년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화 ‘바위나리와 아기별’을 쓴 작가로, 한국 아동문학의 선구자로 불린다. 1957년 제정된 대한민국 어린이헌장의 초안을 작성하며 한평생 어린이 인권운동에 힘을 쏟았다. 6·25전쟁 때는 가족과 함께 대구에 내려 와 공군종군문인단(일명 창공구락부) 단장으로 활동했다. 특히 마해송은 영남일보와 깊은 인연을 맺고 신문지면에 다수의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영남일보는 당시 마해송을 위해 신문사 뒷문 입구 전화교환실을 옮기고 그곳에 전용 책상을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시인에게 아버지는 애(愛)와 증(憎)이 교차하는 존재로 보였다.

“아버지는 개성사람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일본에 맞서 동맹휴학을 주동하다 퇴학당했죠. 그러다 열여섯살에 일본 유학길에 올랐는데 일본에 살면서 잡지 사업을 해서 큰돈을 벌었습니다. 그렇게 모은 돈을 가난한 작가나 일본에 와서 공연하는 한국인들을 후원했죠. 그때 어머니를 만나 결혼도 했고요(시인의 어머니는 우리나라 여성으로는 최초의 서양무용가로 활동한 박외선이다). 그러다 광복전에 귀국하셨죠. 일본에서 모은 재산은 모두 두고요. 전쟁 때 일본 기자들이 한국에서 고생하는 아버지를 보고 일본에 다시 가자고 했지만 마다하셨습니다. ‘나는 일본에 할 수 없이 살았던 거지, 일본이 좋아서 산 게 아니다’고 매번 이야기하셨죠. 자의식이 무척 강했던 분이었습니다.”

시인은 그런 아버지를 ‘한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 ‘이해할 수 없음’은 ‘미움과 원망이 얽혀 있는 증(憎)’의 지점처럼 들렸다.

“아버지는 평생 직장이란 걸 가진 적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글 쓰는 일로만 생활하셨죠. 성격이 깐깐한 데다 불의를 보면 참지를 못하는 분이었습니다. 다행히 문단에서는 대접을 받았습니다. 장준하 선생이 ‘사상계’를 발행할 때 우리집에 와서 무릎 꿇고 앉아서 글 청탁을 하곤 했습니다. 이승만 정권 때는 공보처장인가 공보부장인가 하라고 했는데 아버지가 거절했습니다. 서울신문, 연합신문, 평화일보 같은 신문사에서 사장도 하라고 했는데 모두 손사래를 쳤습니다.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취직자리 다 마다한 건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추측건대 그 성격에 북간도에 가서 독립운동을 하지 못하고, 젊은 시절 일본 한복판에서 잘 먹고 잘살았다는 것에 대한 죄의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청빈하게 살아야 한다는 신념도 한몫한 것 같고요.”

인터뷰를 이어가면서 시인은 대구 피란시절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도 덧붙였다.

“대구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버지는 늘 사무실이 있는 영남일보에 드나들며 기자·문인들과 교류했습니다. 시인 구상·조지훈 선생님과 가장 친하게 지냈죠. 영남일보 건너편에 있었던 막걸리집인 감나무집은 단골술집이었고요. 당시 어머니와는 많이 다투셨습니다. 결혼전에 무용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서 무대에 설 수도 없고, 생활비를 벌어오지도 않으니 어머니가 많이 속상할 수밖에 없었죠. 자의식이 강한 그런 아버지의 성격이 자라면서 두렵고 싫었습니다.”

시인의 아버지는 엄격할 정도로 청빈했다. 이와 관련된 대구 피란시절의 일화는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대구에서 셋방살이를 하며 피란생활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시인은 주인집에 온 신문을 먼저 보고는 다시 넣어둘 생각을 잊은 채 그만 셋방 툇마루에 던져 놓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 마해송은 시인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좁은 방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도망 다니는 것을 따라다니며 가릴 바 없이 무지하게 때렸다. 죽어라고 때렸다’(마해송 선생의 수필 ‘너를 때리고’ 중에서). 아버지는 아무리 사소한 신문이지만 남의 것에 손을 댄 자식을 용서할 수 없었고, 그것은 준엄한 꾸지람이었다.

“자의식이 강하고 평생 가난하게 산 아버지의 뒤를 따른다는 것이 겁이 났습니다. 제가 의대를 간 이유도 어쩌면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시인은 “아버지를 평생 제일 존경한다”고 고백했다. ‘존경’외에는 더이상 어떤 말도 수식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버지 대해 가지고 있는 애(愛)의 지점이었다.

◆영남일보와의 인연

시인은 대구 피란시절 “영남일보를 잊지 못한다”고도 했다. 아버지 마해송의 사무실이 있기도 했지만, 당시 중학생이었던 시인은 영남일보의 ‘잘나가는 신문팔이 소년’이었다.

“학교를 마치면 동생과 함께 서문로 영남일보로 달려갔습니다. 신문사 앞에 도착하면 80명 정도의 아이들이 신문을 받으려고 줄을 길게 서 있었죠. 신문을 20~30부 정도 받아서는 ‘영남일보요’하면서 중앙통으로 달렸습니다. 운동화가 없어서 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여름에는 땀이 나서 맨발로 뛰어다니곤 했습니다. 제가 신문 파는 재주가 있었는지 금방 다 팔고, 동생 것도 팔아주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렇게 신문을 팔면 두부 한 두어모를 살 수 있었죠. 당시 영남일보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전쟁 중에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이었죠. 다른 신문도 있긴 했지만 ‘그런 신문이 있다더라’만 알았지, 그때는 80%이상은 영남일보를 봤습니다.”

어린시절부터 문학적 재능이 있었던 시인은 영남일보에 동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1952년 5월24일자 영남일보에는 중학생 마종기가 쓴 ‘동화사 가는길’이 실려있고, 6월22일자에는 ‘거지’ ‘잿트기’ ‘우리학교’라는 제목의 시 3편이 게재되어 있다. 9월17일자에도 ‘나의집’ ‘지난날’이라는 2편의 시가 실려있다.

“대구에 살 때 영남일보에는 학생 문예란이 있었는데, 기회가 될 때마다 작품을 투고했습니다. 이 역시 제가 시를 쓸 수 있는 큰 자극제가 되었죠. ‘동화사 가는길’이라는 시는 제 첫 시집에 실려 있습니다.”

인터뷰 내내 시인은 대구 피란시절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66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당시 골목 구석구석의 모습이며, 술집과 다방의 상호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시인의 옛집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가슴 한 켠 ‘그때 그 시절 그대로’ 가만히 들어앉아 있는 것이 분명했다. 시인에게 ‘있다’와 ‘없다’는 시각적인 차이일 뿐이었다. ‘부재’는 시인에게 ‘존재’를 증명하는 또 다른 방식처럼 보였다.

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 마종기 시인은

1939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중학생 시절부터 일약 ‘학원 문단’의 스타가 되어 친구들의 연애편지 대필을 도맡는 등 타고난 재능을 보였다. 1959년 연세대 의대 본과 1학년때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등단하면서 ‘의사 시인’으로서의 길을 걸었다.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간 후, 오하이오 주립대학 병원에서 수련의 시절을 거쳐 미국 진단방사선과 전문의가 되었다. 오하이오 의과대학 방사선과 및 소아과 교수 시절에는 그해 최고 교수에게 수여하는 ‘황금사과상’을 수상했다. 이후 톨레도 아동병원 방사선과 과장, 부원장까지 역임했다. 2002년 의사생활을 은퇴하고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다. ‘조용한 개선’을 시작으로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그 나라 하늘빛’ ‘이슬의 눈’ ‘우리는 서로를 부르는 것일까’ 등 수많은 시집을 펴냈다. 한국문학작가상, 편운문학상, 이산문학상, 동서문학상, 현대문학상, 박두진문학상, 대산문학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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