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대구여! 한강선생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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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0-12 00:00  |  수정 2018-10-12
20181012

 금호지구로 불리는 대구시 북구 사수동 아파트 단지 한 가운데에는 한강(寒岡)공원이 있다. 한강공원에는 섬뫼숲을 중심으로 사양정사.마을유래비.공원유래비.한강선생유허비.한강선생급문제현비.연못.정자.실개천.시비 등이 조성돼 있다. 이 중에서도 한강공원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것은 섬뫼숲 정상에 복원돼 있는 사양정사다.
 

한강공원과 사양정사는 한강 정구(1543~1620)라는 인물을 기리기 위해 2014년경에 조성되었다. 한강 정구는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두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조선 중기 대유학자다. 선생은 지금의 검찰총장격인 대사헌으로 있을 때 ‘임해군 역모사건’과 관련, 상소를 올린 후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 성주로 낙향했다. 때는 선생 나이 66세, 광해군이 왕위에 즉위한 1608년이었다. 그 뒤 선생은 ‘박이립 무고사건’ 등의 여파로 70세에 고향인 성주를 떠나게 된다. 이후 칠곡의 노곡정사를 거쳐 72세에 사수동으로 이거, 75세에 사양정사를 짓고 78세에 사양정사에서 졸했으니, 대유학자 한강 정구는 생애 마지막 6년을 대구 사수동에서 보냈다.
 

예학(禮學)과 심학(心學)의 종장으로 칭송받는 한강 선생은 종종 ‘대구 유학의 중시조’로 불리기도 한다. 이는 한강이 대구 유학계에 끼친 영향이 워낙 컸기 때문에 붙은 별칭이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대구의 문풍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는 1500년대 후반에서 1600년대 초반이다.
 

이 시기는 서사원, 손처눌 같은 인물들이 대구의 문풍을 이끌던 때였다. 그런데 이들에게 눈에 띄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이들 모두가 한강 선생의 제자였다는 점이다. 당시 대구의 선비들은 한강이 사수동으로 이거하기 전부터 이미 성주의 선생 문하에 출입을 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한강이 사수동에 정착하게 되자 대구의 선비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선생의 문하에 출입했던 것이다. 당시 사수동의 강학소가 바로 사빈서재와 사양정사였다.
 

대구 유학에 있어 한강 선생의 영향력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이를 쉽게 확인해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한강공원에 세워져 있는 한강선생 제자명단을 확인해보면 된다. 여기에는 모두 357명의 명단이 올라있는데, 가나다순에 본관까지 표기가 되어 있어 찾아보기에도 편리하다. 누구든지 이 명단에서 자신의 선조 이름을 찾아보면 되는데 그 결과가 참으로 놀랍다. 대구시민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이 명단에서 자신의 선조 이름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수동에 한강공원이 조성되고 사양정사가 복원될 수 있었던 것은 대구와 한강 선생과의 400년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해 왔던 이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만약 이들의 관심과 노력이 없었더라면 사수동의 역사와 유적은 영원히 사라져버릴 뻔했다. 10월13일 토요일 오전, 사수동 한강공원에서는 400년 만에 복원된 사양정사 복원 고유제가 열린다고 한다. 나들이하기에 참 좋은 계절이다. 가족과 함께 대구 문풍의 본거지였던 사수동 한강공원으로 나들이를 한 번 해보면 어떨까.

송 은 석 (대구시 문화관광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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