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경의 영화의 심장소리] 모든 여행은 비밀 목적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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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0-19   |  발행일 2018-10-19 제42면   |  수정 2018-10-19
‘이탈리아 횡단밴드’ (로코 파팔레오 감독·2010년 개봉·국내 개봉 2012·이탈리아)
[김은경의 영화의 심장소리] 모든 여행은 비밀 목적지가 있다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참으로 많다. 피렌체가 배경인 ‘냉정과 열정 사이’를 비롯해서 우디 알렌 감독의 ‘로마 위드 러브’, 베로나를 배경으로 옛 사랑을 찾아 떠나는 ‘레터스 투 줄리엣’ 등등 주로 꿈과 낭만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곳이 이탈리아다. 하지만 영화 ‘이탈리아 횡단밴드’는 우리에게 익숙한 로마도, 피렌체도, 베네치아도 아닌 ‘바실리카타’를 여행하는 음악영화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바실리카타는 주연배우이자 감독인 로코 파팔레오의 고향으로, 이탈리아 남부 지역에 위치한 곳이다. 개발이 많이 되지 않아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며 최상급의 와인 생산지로도 알려져 있다. 영화는 남유럽 전체에서 7개월 동안 흥행 돌풍을 일으켰으며, 이탈리아에서도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는 등 신드롬을 일으켰다고 한다.

왕년에 잘 나가던 동네밴드였지만 지금은 일상에 찌든 중년의 아저씨가 된 네 명의 친구가 의기투합해서 음악축제에 참가하기로 한다. 차로 한 시간 반이면 도착하는 거리를 열흘에 걸쳐 도보 여행을 하며, 머무는 곳마다 연주를 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인생은 짧다. 그러니 길게 만들자”고 외치며 말과 수레를 끌고 유유자적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영화 속 대사처럼 이 ‘시대착오의 연대기’에는 까칠하고 매사에 심드렁한 여기자가 취재를 위해 동행한다. 이들은 함께 바실리카타를 횡단하는 동안 많은 일을 겪으며 각자 예상치 못했던 결과를 얻게 된다. 중년 아저씨들의 성장 영화라고 하면 될 것 같다. ‘마차 타고 고래고래’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청춘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몇 년 전에 이 영화를 보고 참 매력적이라 여겼는데, 최근에 다시 볼 때는 느낌이 달랐다. 우선 영화가 좀 답답했다. 그리고 유유자적한 네 남자가 다소 한심하게까지 여겨졌다. 차로 한두 시간 걸리는 거리를 뭣하러 열흘 동안 간다는 말인가? 그 지나친 느긋함에 짜증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한참 뒤에 깨달았다. 최근 너무 바쁘게 ‘일에 치여’ 지냈으며, 이런 나의 유능함(?)에 몹시 만족해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김은경의 영화의 심장소리] 모든 여행은 비밀 목적지가 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잠시 생각했다. 내게 주어진 이런저런 일들에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이런 ‘일’이 나의 정체성인가? 물론 아니다. 모든 여행은 과정 자체가 목적이듯 인생이라는 여정도 일뿐만 아니라 모든 순간이 다 소중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떤 지도 너무 오래됐다. 오랜만에 연락온 친구의 부름에 응했다. 바쁘다며 세 번이나 약속을 미뤘던 친구다. 친구와 나는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그동안 힘들었던 얘기며, 즐거웠던 일들을 나누었다. 자주 불면의 밤을 보내는 요즘, 그날은 비로소 잠을 푹 잤던 것 같다.

나에게 느긋함과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 가르쳐준 이 영화의 끝은 이렇다. 네 명의 친구들은 결국 목적지였던 음악축제에 참가하지 못한다. 축제가 끝난 후 한밤중에야 도착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시골길이 거기가 거기 같아서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시작했을 때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단 한 명의 관객 앞에서 음악을 연주한다. 그러자 그들은 비로소 알게 된다. 각자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목적을 이루었다는 것을. 우울증 때문에 의사의 꿈을 접었던 살바토레는 다시 공부를 계속할 이유를 발견하고,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 이후 말을 잃었던 프랑코는 사랑을 찾고 다시 말을 찾는다. 별 볼일 없는 단역배우이면서 스타 행세를 하던 로코는 허세를 버리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온다. 10년이 넘게 말로만 음악축제에 참가하겠다던 니콜라는 비로소 뜻을 이루고 부인에게 인정을 받는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여전히, 아니 한결 깊어진 우정과 음악이 곁에 있다.

“모든 여행은 여행자가 인식하지 못하는 비밀 목적지를 가지고 있다”라는 마르틴 부버의 말이 있다. 인생이라는 여정에는 도착해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목적지가 있는 것이다. 시작할 때는 결코 알지 못했던, 자신의 계획과는 다른 곳에 문득 도착해 있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음악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길을 떠났던 네 친구가, 떠날 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다른 목적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그것은 길을 나서지 않았으면 결코 발견하지 못했을 ‘비밀 목적지’였다. 시인·심리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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