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506편의 주연…마지막까지 “나는 딴따라 아닌 영화인”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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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1-05 07:45  |  수정 2018-11-05 09:20  |  발행일 2018-11-05 제6면
■ 그의 발자취
1960년 ‘로맨스 빠빠’로 데뷔
‘맨발의 청춘’으로 최고스타 부상
8년간 韓 영화 개봉작 324편 출연
71년엔 ‘연애교실’로 감독 입문
성일시네마트 설립…제작자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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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작 영화 ‘로맨스 빠빠’에서 둘째 아들 바른이 역으로 데뷔한 신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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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일을 당대 최고의 스타 반열에 올려 놓은 1964년 영화 ‘맨발의 청춘’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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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제7회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신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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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작 영화 ‘별들의 고향’에서 열연하는 신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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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계의 큰 별이 졌다. ‘영원한 오빠’ 신성일이 4일 새벽 타계했다. 향년 81세.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았던 고인은 당시 “그깟 암세포 모두 다 떨쳐내겠다. 이겨낼 자신이 있다”며 강한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을 비롯해 올해 10월 열린 부산영화제에도 참석해 건재함을 과시했던 터라 안타까움을 더했다. 그렇게 그는 마지막까지도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던 ‘천생 영화인’이었다.

1937년 대구에서 출생한 신성일은 대구수창초등학교, 경북중·고등학교를 거쳐 건국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빼어난 외모와 지적이고 반항적이면서 성적 매력이 넘치는 고인의 이미지는 1950~60년대 기존 배우들과 차별화됐다.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그는 1962년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의 주연으로 발탁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성일이라는 이름 석자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건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1964)이다. 카리스마 넘치면서도 반항적인 이미지로 당대 최고 스타로 부상했는데, ‘한국의 알랭 들롱’ ‘한국의 제임스 딘’으로 불릴 정도로 청춘영화의 대명사가 됐다. 이 작품은 당시 서울에서만 36만명을 동원할 정도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신성일은 인기 절정기인 1964년 11월 워커힐호텔에서 당대 최고 여배우인 엄앵란과 결혼했다. 하객과 팬 4천명의 인파가 몰린 두 사람의 ‘세기의 결혼식’은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신성일의 전성기는 결혼 이후에도 계속됐다. ‘떠날 때는 말 없이’(1964) ‘위험한 청춘’(1966) ‘불타는 청춘’(1966) 등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며 부와 인기를 거머줬다. 당시 100여 명의 여배우가 신성일의 상대역을 맡았다고 할 만큼 남자 배우로서는 당시 독보적이었다.

부산영화제와 한국영상자료원이 지난해 ‘신성일 회고전’을 맞아 펴낸 책 ‘배우의 신화, 영원한 스타’에 따르면 1967년 한 해에만 신성일이 주연한 영화 51편이 극장에 걸릴 정도였다. 1964년부터 1971년까지 8년간 한국영화 개봉작 1천194편 중 324편에 그가 등장했다. 신성일은 1990년대에 들어서서도 ‘비 오는 날의 수채화’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 ‘장군의 아들 3’ ‘축제’, 2000년대에는 ‘태풍’ ‘야관문: 욕망의 꽃’ 등에 출연하며 지치지 않는 연기 열정을 과시했다. 생전에 총 536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506편에서 주연을 맡았다.

배우 인생만 걷지는 않았다. 정치에도 눈을 돌린 신성일은 11대(1981), 15대(1996) 총선에서 거푸 낙선한 끝에 2000년 16대 총선 때 대구 동구에서 한나라당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시련도 있었다. 2003년에는 대구유니버시아드 대회와 관련해 광고업자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당대 최고 스타답게 스캔들도 끊이지 않았는데 2011년에 펴낸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에서 연극배우와 아나운서로 활동한 고(故) 김영애씨(1944~1985)를 1970년대에 만나 사랑한 이야기를 공개해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갖은 구설수와 상관없이 한국영화에 대한 애정은 누구보다도 컸던 그다. 1971년엔 ‘연애교실’로 감독에 입문했고, 1989년에는 성일시네마트를 설립해 제작자로도 활동했다. 그는 지난해 부산에서 만난 취재진에게 “나는 ‘딴따라’ 소리가 제일 싫다. 딴따라 소리 들으려고 영화계에 뛰어든 것이 아니다”며 “영화를 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종합예술 속의 한가운데 있는 영화인”이라고 강조했다. 영천에 한옥을 지어 살던 고인은 그곳에서 ‘인생 2막’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세워놨다. 1년에 한 번씩 소규모 음악회를 여는 등 사람들의 쉼터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밝혔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 바람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고인의 장례식은 영화인장으로 엄수된다. 지상학 한국영화인총연합회 회장은 4일 낮 고인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서 브리핑을 갖고 “신성일 배우의 장례를 영화인장으로 치르기로 했다”고 밝혔다. 공동 장례위원장은 지 회장과 후배 배우 안성기가 맡았으며, 고문은 신영균·김동호·김지미·윤일봉·김수용·남궁원·임권택·정진우·이두용·오석근·문희가 맡기로 했다. 영결식은 6일 오전 10시에 진행하며, 오전 11시 서울추모공원으로 고인을 옮겨 화장한다. 장지는 영천 괴연동 고인의 자택인 성일가(星一家) 내 정원이다. 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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