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영화, 음식을 캐스팅하다] ‘바람둥이 길들이기’의 복수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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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1-15   |  발행일 2018-11-15 제40면   |  수정 2018-11-15
7명의 여자와 바람 피운 남편에게 만들어 주는 ‘죽음의 파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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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람둥이 길들이기’의 한장면.

“식초에는 구두쇠가 되어야 하고, 올리브오일에서는 낭비벽이 있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소금은 현명하게, 후추는 분별 있게 뿌려야 하고, 나중에는 그것을 미친 사람처럼 뒤섞어야 한다.” -움베르토 에코

[백정우의 영화, 음식을 캐스팅하다] ‘바람둥이 길들이기’의 복수혈전
영화 ‘바람둥이 길들이기’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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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람둥이 길들이기’ 포스터.

‘천하에 제일 나쁜 놈 어떻게 없앨까’
파스타에 다량의 수면제 넣을 계획
죽음의 세레나데로 꽉 채우는 부엌
비극과 희극의 이중주 통쾌함 교차

진지하면서 유머러스한 살해 과정
정확하고 치밀하게 보여주는 요리
살해 위협에 부도덕함 깨달은 남편
아내·어리숙한 킬러 용서하며 엔딩

철석같이 믿었던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 한 명도 아니고 수를 헤아릴 수도 없다. 그의 고해성사대로라면 일주일간 7명의 여자와 12번 이상의 관계를 가졌고, 이중 두 명과는 심각한 상태다. 유고슬라비아 출신으로 이탈리아 이민자 남편을 만나 피자가게를 운영하며 아이도 둘 낳고 장사도 잘 되고 주변 인심도 얻어 크게 남 부러울 것 없는 인생이라고 여겼는데 말이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뭘 어떡하나, 죽여야지. 그런 천하에 나쁜 놈은 죽어 마땅하다.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 누가 실행할 것이냐다. 남편을 죽이는 동시에 살인을 저지르는 일이다. 조이는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고 아프지도 않는 남자다. 짐승처럼 동물적 욕구가 발달한 그를 눈 뜬 상태에선 달리 상대할 방법이 없다. 아내 로잘리는 코끼리도 쓰러뜨릴 만한 양의 수면제를 넣고 파스타를 만든다. 남편이 잠들면 총으로 쏴 죽이겠다는 계획이다. 이탈리아인 주식이니 의심을 피하기에도 제격이다. 파스타 잘 만드는 건 대수롭지 않다. 바질과 향신료와 후추와 갖은 재료가 범벅되고 마침내 다량의 수면제가 투하된다. 죽음 직전에 느끼는 환희야말로 살아서는 느낄 수 없는 궁극의 세계라 했던가. 남편 조이는 최고의 파스타라 극찬하며 세 그릇이나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

로잘리가 파스타를 조리하는 과정은 비극과 희극의 이중주다. 그들은 부엌을 죽음의 세레나데로 채운다. 두려움과 복수의 통쾌함이 교차하는 음험한 정서가 가득하다. 사랑을 노래하는 시가 상대를 가능한 한 빨리 침대로 데려가려는 시도로 보이지 않도록 세심한 은유로 감추듯이 죽음의 파스타 또한 그렇게 만들어진다(사랑을 노래한 문학도 로잘리의 파스타도 최종목적은 상대를 침대로 데려가는 것이다). 살해극의 과정은 진지하면서 유머러스하다. 로렌스 캐스단이 연출을 맡고 케빈 클라인의 마초 가득한 바람둥이 연기가 인상적인 영화 ‘바람둥이 길들이기’는 바람둥이 남편과 그를 처치하려는 아내와, 아내의 조력자가 펼치는 좌충우돌 소동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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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파스타에 수면제를 넣어 남편을 재운 후 죽인다고? 햄버거나 스테이크도 있는데 왜 하필 파스타인가. 검은 망토 입은 마녀할멈이 독약을 떨어뜨린 음식도 커다란 솥에 담긴 수프였다. 이탈리아 사람이 보면 기겁할 일이다. 과연 그럴까. 15세기말 피렌체로 가보자.

1473년, 젊은 다빈치(당신이 아는 천재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맞다)는 공방에서 견습생으로 일하며 부족한 월급을 메우기 위해 피렌체 베키오 다리 근처에 있는 ‘세 마리 달팽이’라는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한다. 어느 날 파스타에 함유된 정체불명의 독극물로 요리사가 모두 사망하자, 다빈치는 주방장으로 승격되지만 그가 만든 요리가 지나치게 창조적인 탓에 결국 해고되고, 다빈치는 한 친구와 동업해 ‘산드로와 레오나르도의 세 마리 두꺼비’라는 식당을 차린다. 그 친구는 바로 ‘비너스의 탄생’을 그린 산드로 보티첼리다. 식당 밖에는 두 사람이 그린 두 개의 간판을 걸었다. ‘강동원과 송중기’가 함께 식당을 연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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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로맨틱한 이탈리아 브로맨스 식당은 오래가지 못하고 문을 닫는데 하마터면 르네상스 예술사가 휘청했을 일이다. 다른 한편으로 다빈치가 음식솜씨마저 탁월했더라면 아마도 우리는 조금 더 색다른 파스타를 만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영화에 등장하는 이탈리아인 다수는 하층민 아니면 마피아다. 스테이크를 썰거나 프랑스식 정찬을 즐길 여유가 없다. 파스타를 먹어도 기본인 올리브 파스타가 대종을 이룬다. 시칠리아 어부의 척박한 삶을 그린 ‘흔들리는 대지’에서 주민들은 영화 내내 파스타만 먹으며 마피아의 식탁을 장식한 음식 역시 올리브 파스타였다(거대한 체형의 머리 벗겨진 마피아가 앞치마를 목에 두르고 파스타 먹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신속하게 배불리 먹고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거나 황급히 뛰쳐나가 총질하기에 이만한 음식이 없다. 반면 ‘바람둥이 길들이기’에선 토마토 파스타가 등장한다. 이탈리아 이민자로 열심히 일하며 자기 가게를 차린 중산층의 삶이 토마토 파스타로 완성된다. 재료가 곧 경제력인 것이다. 유머러스한 연출을 위해 다량의 향신료를 포함시켰음에도 영화에서 파스타 만드는 과정은 정확하고 치밀하다. 소품에 불과한 음식이라도 대충하지 않는 장인정신. 이것이 할리우드의 힘이다.

천신만고 끝에 잠재우는 데 성공했어도 마무리가 남았다. 첩첩산중이다. 로잘리를 흠모하는 종업원 디보가 가세하고, 약물중독인 어설픈 킬러 두 녀석이 동원된다. 그러나 눈 감고 쏜 총은 머리를 스치고, 심장 위치가 헷갈려 오른쪽 가슴에 쏜 덕에 조이는 목숨을 건진다. 아내와 장모와 종업원과 킬러 모두 연행되어 감옥에 가는 이 상황이 자신의 부도덕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깨달은 조이는 그들을 선처하여 석방시킨다. 어쨌거나 해피엔딩, 그리고 The End.

파스타가 생각날 때면 나는 대명동 어디쯤 레스토랑으로 간다. 깔끔한 올리브 파스타로 깊은 인상을 남긴 곳이다. 올리브 파스타는 햄버거보다 간단하고 비빔국수보다 쉽다. 면을 삶아 올리브유 두른 팬에 마늘 몇 쪽과 함께 볶아내면 끝. 영화 속 이탈리아인처럼 시간에 쫓길 정도로 숨 가쁜 삶은 아니지만 ‘알 덴테’로 삶은 면과 고소하고 담백한 맛을 잊지 못해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만 먹는다. 올리브 파스타 잘하는 이탈리아 식당은 믿어도 좋다는 ‘근거 있는 믿음’에서다.

(영화평론가, 한국능률협회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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