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쌀의 갈길은] 쌀의 인문학 논에서 밥상까지(상)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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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1-15   |  발행일 2018-11-15 제41면   |  수정 2018-11-15
모∼벼∼쌀 88번의 손길…경북은 토질에 잘 맞는 ‘일품’ 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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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알의 쌀은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이 선순환해야 얻을 수 있는 천지조화의 상징이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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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미(米) 자를 파자하면 팔(八)+십(十)+팔(八)자로 이뤄져 있다. 88번의 손길을 거쳐야 비로소 한 알의 쌀이 완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벼~나락~쌀~밥이 되는 과정을 선조들은 그걸 ‘천지조화(天地造化)’라 여겼다. 식(食)은 곧 ‘밥(飯)’. 밥은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이 농부의 농심과 삼위일체돼야만 가능하다. 농경사회에선 ‘쌀 지상주의’, 아니 ‘쌀 결정론’의 시대였다. 쌀농사가 거덜나면 민초의 삶도 거덜난다. 나랏님은 오매불망 벼농사 걱정뿐이었다. 지금도 한국인의 삶 속에서 쌀은 이 나라의 국격(國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식량주권의 대명사인 쌀, 하지만 갈수록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고 있다. 고차방정식을 푸는 것 같은 쌀값의 결정방식, 빵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국민대표식이어야 될 쌀. 그것이 가진 식품영양학적 강점을 우린 너무 등한시하고 있다. 빵시대에 맞서는 퓨전 쌀요리도 대중화시켜야 할 시점이다. 앞으로 3회에 걸쳐 ‘쌀의 인문학 논에서 밥상까지 (상)’ ‘쌀값을 통해 본 한국쌀의 경쟁력(중)’ ‘쌀…힐링푸드의 보루(하)’란 주제로 한국 쌀이 가야 할 방향에 대해 다각도로 모색해본다.

◆ 쌀의 기원을 찾아서

쌀은 인류의 농업사를 축약하고 있다. 소금과 함께 인류 생명의 원천이었다. 화폐는 물론 사회제도와 풍속의 근간을 차지했다. 그런 흔적이 한자어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조사에 의하면 미(米) 자가 들어간 한자어는 모두 249개. 벼 화(禾)가 들어간 한자는 284개. 곡식 곡(穀)에도 화(禾) 자가 들어간다. 보리·팥·조·수수·콩·기장 등 수많은 곡식 가운데 으뜸은 역시 쌀이란 의미다. 시간의 가장 작은 단위인 초(秒)에도 계절의 변화를 일러주는 계절 계(季)에도 화(禾)가 들어 있다.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秦)나라 이름에도 화(禾)가 들어간다. 속담에도 쌀 이야기는 빈발한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쌀독에서 인심난다. 자식은 내 자식이 커 보이고 벼는 남의 것이 더 커 보인다…. 민속학에서도 쌀의 위치는 중차대하다. 아기를 낳은 산모는 첫 국밥으로 흰쌀밥과 미역국을 먹었다. 통과의례식의 축이었던 떡, 그것의 주재료는 쌀이다. 흥부의 박에서 제일 먼저 나온 것도 금은보화가 아니라 흰쌀밥이다. 예전 어르신의 소원 중 하나는 이밥(쌀밥)에 소고기국을 먹는 것이다.

◆ 자포니카와 인디카 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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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판에서 모를 내고 벼를 도정해 쌀로 만들기까지 무려 88번 이상의 손길이 가야 얻을 수 있는 쌀. 매년 늦가을엔 황금들녘이고 풍년농심은 곧 국민 민심과 직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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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천여 년 전부터 경작되기 시작한 벼. 이후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확연하게 갈라놓는 결정적인 매개체가 된다. 세계 100여 개국에서 재배하지만 아시아 지역이 전체 재배 면적의 90%를 차지하는 곡물이 바로 벼다.

서양의 주식은 밀, 서남 아시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아시아는 쌀이 주식이다. 그런 밀 문명과 벼 문명을 결정짓게 된 변수는 바로 기후와 풍토. 밀의 경우는 내열성·내건성이 강해 기후에 별다른 구애를 받지 않으며 강수량이 적은 지역에서도 잘 자란다. 반면, 쌀은 고온 다습한 기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단위 면적당 칼로리 생산량에 있어 벼는 밀을 압도한다. 밀의 3배다.

호서대 정혜경 교수(식품영양학과)가 2015년 펴낸 책 ‘밥의 인문학’을 보면 한국의 정체성은 왜 쌀에서 시작돼야 하는가를 역설한다. 정 교수는 “우리가 쌀을 외면했을 때 한민족으로서의 자긍심도 동시에 균열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한다”고 말한다. 정 교수에 따르면 1998년 충북 청원군 소로리 구석기 유적지에서 오래된 볍씨가 발견되었는데 놀라운 사실은 이 볍씨가 세계 최초의 볍씨로 판명났다고 한다. ‘소로리 볍씨’라 부르는 고대형 볍씨는 자포니카 계통으로 재배벼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볍씨는 서울대 AMS(방사선탄소연대측정) 연구실과 미국의 지오크론 연구실(Geochron Lab)의 절대연대값 측정을 통해 1만3천~ 1만5천년 전의 것으로 판명된다. 이는 벼농사가 구석기 시대부터 시작되었음을 시사하는 역사적인 발견이다. 종전까지 한반도 쌀농사는 기원전 1천년쯤인 청동기시대로 전해졌다.

현재 벼의 전신은 야생종. 야생종이 재배종으로 바뀐 시기는 8천여 년 전. 재배종이 된 것은 벼속에 속하는 20여 종의 벼 중 아시아종(학명 오리자 사티바)과 아프리카종(학명 오리자 글라베리마) 두 가지였다. 아프리카종은 유전적 변이가 단순해 널리 퍼지지 못했다. 하지만 아시아종은 품종개량을 통해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간다.


하늘·땅·기운과 농부·농심 삼위일체
벼·쌀 한자어, 속담·세금·화폐 단위
식량주권‘쌀’…빵에 밀려 천덕꾸러기

충북 구석기 유적지서 세계 최초 볍씨
쌀알 둥글고 짧으며 끈기있는 자포니카
베트남 등 재배, 쌀 무역량 90% 인디카

일제강점기 한국 재래종 쌀 자취 감춰
1960년대 쌀 부족에 허덕…통일벼 개발
자포니카·인디카 교합, 생산성 30% ↑

現 100품종 이상 유통…20여종 고품종
일본서 들여온 ‘추청’ 한때 식탁 장악

상주 ‘풍년쌀골드’ 예천‘새움일품쌀’
의성‘의성진쌀’등 도내 6대 브랜드



재배벼는 재배 지역과 형태에 따라 자포니카(Japonica)·인디카 (Indica)·자바니카(Javanica)로 분류된다. 자바니카는 인디카와 거의 흡사하기에 두 가지로만 분류하기도 한다. 우리가 먹는 부드럽고 차진 밥은 자포니카. 쌀알이 둥글고 짧으며 끈기가 있다. 일명 ‘안남미’로 불리던 길고 납작하며 찰기가 없는 게 인디카다. 쌀의 길이가 길고 훌훌 날리는 것이 특징이다. 길 ‘장(長)’ 자를 써서 ‘장립종’이란다. 주로 중국 남부, 동남아, 베트남 등지에서 재배한다. 인디카는 전 세계 쌀 무역량의 90%를 차지한다.

◆ 통일벼와 한국 대표 품종 벼

벼의 족보는 어떻게 될까? 통일신라시대의 주식 유형을 보면 북부는 조, 남부는 보리, 귀족은 쌀이었다. 고려시대는 쌀이 물가의 기준이었고 봉급 대상으로 여길 정도였다. 일반 백성이 쌀밥 구경이라도 할 수 있게 된 것은 조선시대 중기 이후였다. 영조가 관개시설을 정비하고 직파법 대신 모내기 농법을 장려하면서 쌀 생산량이 증가했다. 그렇다고 하여 모두가 배부르게 쌀밥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60년대까지도 우리나라는 쌀 부족에 허덕였다.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고자 1964년 서울대 허문회 교수는 ‘통일형 벼(통일벼)’를 개발했다. 통일벼는 자포니카와 인디카를 교합한 것으로 타 품종보다 생산성이 30%가량 높다. 하지만 통일벼의 영광은 10년을 넘지 못한다. 자포니카의 달고 차진 맛에 익숙한 우리에게 인디카와 비슷한 식감인 통일벼는 입에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병충해에 약했다. 1980년대에 들어 비료와 농장비의 발달로 질 좋고 맛있는 쌀 생산이 가능해졌다. 우리는 과거에 쌀이 부족했던 시기가 있었다. 정부에서는 이 시기를 이겨내고자 수확량이 높은 쌀에 매달렸다. 한때 우린 통일벼를 맛없는 정부미의 상징으로 폄훼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통일벼는 우리의 얼이 들어간 우리의 품종임을 부정할 순 없다. 베트남 등 한국을 제외한 여러 나라에 여전히 상당한 경쟁력을 갖고 있고 베트남에선 시험재배용으로 인기가 좋다.

한국의 재래종 쌀이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문이다. 1906년에 설치된 ‘대한제국 권업모범장’은 오늘날 농촌진흥청의 모태다. 권업모범장은 1907년 대한제국 정부로 이양되었지만 경영 방침은 통감부의 지침을 그대로 따랐다. 초창기 권업모범장이 조사한 재래종 논벼와 밭벼는 무려 1천451종에 달했다. 단적으로 경기지방에는 노인벼·자체벼·소하벼·붉은벼·이리벼 등이 있었고, 전라도 지역에는 팥벼·흰벼·쌀벼·해남벼·지리벼·은모레기찰·모록찰 등이 있었다. 산림경제지에는 36종의 쌀 품종이, 임원경제지에는 68품종이 기록돼 있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100품종 이상의 쌀이 유통된다. 농촌진흥청에서 고품질 품종으로 20여 종을 주시한다. 추청·오대·동진·삼광·일품·남평·고시히카리 등이 그 주인공이다. ‘고시히카리’는 1944년 일본 니가타현의 농사시험장에서 개발을 시작해 1953년 후쿠이현의 농사시험장에서 개발이 완료됐다.

지금의 한국사람들이 먹는 쌀의 대부분은 ‘추청’이나 그것을 바탕으로 한 개량품종이다. 추청은 ‘높은 가을 하늘’을 뜻하는데 쌀알의 투명도가 높아서 겉모양이 좋고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높다. 속칭 ‘아키바레’라고 불리는 이 쌀은 1960년대 일본에서 들어왔다. 지금은 동진쌀 등 개량품종에 1위의 자리를 넘겨줬지만 한때 한국의 식탁을 장악했던 쌀이다.

어떻게 이 쌀이 퍼지게 되었을까. 통일벼 전문가 중 한 명인 최해춘 박사에 따르면 1965년쯤 들여와서 처음에는 주로 경기도 김포 지역에만 심겨진다. 당시 경기도 지역에는 통일벼를 심기에 맞지 않는 지역이 있었고 거기에 심었던 것이 추청이다. 사실 추청이 품종이 좋은 건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통일벼가 수량은 많이 나는데 밥맛이 떨어지니까 ‘경기미의 대표’로 인식되면서 살아남은 거다. 고시히카리는 국립종자원 경기도지원에서만 생산하기에 경기도 지역에 우선 공급된다. 그렇다 보니 다른 도에서는 현실적으로 고시히카리 보급종 종자를 신청할 수가 없다. 그래서 고시히카리는 경기도만 재배할 수 있는 품종으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

토종 종자의 마지막 보루인 국립종자원도 이참에 한국형 벼 품종 유지에 대한 의지를 재점검할 시점이다. 고시히카리도 일본에 로열티를 지급하고 국내 토질에 적응과정 없이 그대로 수입해 심은 것이다. 어떻게 보면 한국쌀이라기보다 ‘일본쌀’이다.

경북은 전국에서는 유일하게 ‘일품’을 선호한다. 현재 50% 이상 재배농가가 그 품종을 사용한다. 보통 비료를 많이 사용하면 벼가 잘 넘어지고 밥맛도 떨어지지만 일품은 경북 토질에 잘 적응해 비료를 사용해도 양질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이런 조건 속에 태어난 올해 도내 6대 브랜드 쌀은 상주의 ‘풍년쌀골드’, 예천의 ‘새움일품쌀’, 상주 ‘명실상주쌀’, 상주 ‘아자개쌀’, 의성 ‘의성진쌀’과 ‘안계농협쌀’이다. 현재 경북의 경우 의성과 상주가 특급쌀 지역이고 경주·예천·안동 등이 그 뒤를 이어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참고로 경북은 54만9천t을 생산해 전남·충북·전북에 이어 지난해 전국 4위의 쌀 생산지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 이 기사는 영남일보와 농식품부 공동기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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