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비격진천뢰

  • 배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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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1-17   |  발행일 2018-11-17 제23면   |  수정 2018-11-17

예나 지금이나 전쟁이 나면 첨단무기의 경연장이 되기 마련이다. 임진왜란 때도 그랬다. 당시 왜군은 16세기 초반 스페인에서 개발된 ‘아퀴버스’를 본떠 만든 조총(鳥銃)으로 무장했다. 나는 새도 쏘아 떨어뜨린다고 해 조총으로 불렸지만 탄환을 장전해 발사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 숙련된 사수라도 1분에 2발을 쏘는 데 그쳤다. 사정거리도 50~100m에 불과했고, 왜군 전체 중 조총을 가진 비율도 10%를 넘지 않았다. 이에 맞선 조선군의 신무기는 바다에선 거북선·화포가, 육지에선 비격진천뢰·신기전·편전 등이 승리의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 비밀병기 중에서도 비격진천뢰는 최첨단 비대칭 무기였다. 왜적이 침략하기 1년 전인 1591년 군기시 화포장(火砲匠) 이장손이 발명했다. 1813년 편찬된 병기서적 융원필비(戎垣必備)에 나오는 제작법은 이렇다. 둥그런 무쇠 속에 화약과 인명살상용 쇳조각을 넣고 오늘날 폭탄의 신관 역할을 하는 죽통(竹筒)을 꽂는다. 대나무 통 안에는 나선형의 홈을 파 도화선을 감은 나무(木谷)가 들어 있어 시한폭탄 역할을 한다. 빨리 폭발시키려면 도화선을 10번, 더디게 폭발시키려면 15번 감는다. 완성된 비격진천뢰는 도화선에 불을 붙인 뒤 화포에 넣어 발사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비격진천뢰는 단순히 날아가 성벽이나 함선을 부수는 쇳덩어리가 아니라 적진에서 자체폭발을 일으켜 인명을 살상하는 작렬포였다는 사실이다.

신무기인 만큼 화력도 막강했다. ‘1592년 9월1일 경상좌병사 박진이 비격진천뢰를 성안으로 발사했다. 왜적이 떨어진 비격진천뢰를 앞다퉈 구경하는 사이 포탄이 터졌다. 소리가 진동했고, 별처럼 퍼진 쇳조각에 맞은 20여명이 즉사했다.’ 왜군들이 점령하고 있던 경주성을 탈환할 때 사용된 비격진천뢰의 위력을 생생하게 전하는 선조수정실록 기록이다. 심지어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비격진천뢰포 하나의 위력이 수천명 군사보다 낫다’고 높이 평가했다.

이순신 장군도 해전에서 활용했던 비격진천뢰가 최근 전북 고창군 무장읍성 발굴과정에서 무려 11점이나 쏟아졌다. 비록 조선후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전하는 비격진천뢰가 사용하고 남은 탄피이거나 속이 빈 것인 데 반해 이번 발굴품은 사용하지 않은 온전한 상태라 앞으로 연구가 기대된다. 아무튼 이번에 세상에 나온 비격진천뢰가 실록에 한 줄의 기록으로만 전하는 이장손을 재조명하고 선조들이 이룩한 과학기술의 우수성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배재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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