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8] 최치원의 聖地<3> 의성 고운사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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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1-22   |  발행일 2018-11-22 제13면   |  수정 2021-06-22 17:42
벼슬 버리고 세상 떠돌다 머문 사찰…유·불·도 사상 통합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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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1년 의상 대사가 지은 고운사는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고찰이다. ‘높은 구름’을 뜻하는 고운사(高雲寺)로 불리다가 최치원이 거처간 뒤부터 그의 자(字)를 따 ‘고독한 구름’을 의미하는 고운사(孤雲寺)로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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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이 고운사에 머물며 지은 가운루. 계곡을 가로질러 지은 모습이 마치 둥실 뜬 배처럼 보인다. 옛날에는 ‘누각에 서면 아래로는 계류가 흐르고, 뒤로는 찬란한 산들과 구름의 바다를 접하는 신선의 세계’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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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이 가운루와 함께 지은 우화루.

 

구름을 타고 오른다는 등운산(騰雲山). 산의 서쪽 산자락은 연꽃이 반쯤 피어난 형상이다. 꽃 가운데에서는 샘이 솟아 안망천(安望川)으로 흐른다. 거기 샘솟는 꽃자리에 고운사(孤雲寺)가 자리한다. 

 

고운사는 신라 신문왕 원년인 681년 해동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 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원래 절집의 이름은 고운사(高雲寺), ‘높은 구름’의 절집이었다. 

 

산을 오르는 길은 수백 년 된 소나무들의 솔굴이다. 소나무 굽은 둥치를 부여잡고 아기단풍이 고개 내밀고, 길섶의 얕은 계곡엔 물소리가 조용하다. 

 

1천여 년 전의 어느 날,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경주를 떠나 경상도 북쪽으로 향했다. 그는 영천과 신녕을 지나고 군위를 거쳐 의성의 빙산에 들었다가 이곳으로 왔으리라 여겨진다. 

 

그때도 고운사 가는 걸음마다 솔향이 났을까. 혹 구름을 타고 올랐을까. 벼슬을 내려놓고 세상을 떠돌던 그는 고운사에서 마음을 비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갈등 없는 화목한 세상 이상으로 여겨
도교 사상이 담긴 가운루·우화루 지어
이후 도선 국사가 일으켜 세운 고운사
고려·조선시대 거치며 수차례 중창돼
왜란때는 사명 대사의 승군 전방기지



#1. 고독한 구름, 고운사

산문에 든다. ‘등운산 고운사(騰雲山 孤雲寺)’ 현판을 단 일주문 속에 천왕문이 들어앉았다. 이곳에 도착한 최치원은 한동안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여지(如智)·여사(如事) 스님과 함께 두 채의 건물을 지었다. 가운루(駕雲樓)와 우화루(羽化樓)다. 천왕문을 지나면 오래된 석불들을 모신 자그마한 고불전 위로 커다란 가운루가 출항하는 배처럼 둥실하다. 가운루란 ‘구름을 타고 앉은 누각’이라는 뜻이다. 곧 신선의 세계다. 원래 이름은 ‘가허루(駕虛樓)’였다. ‘허공을 담은 가마’라는 뜻이다. 가운루도 가허루도 모두 도교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 뒤를 우화루가 따른다. 번데기가 날개 달린 나비로 변하는 것이 우화(羽化)다. 훗날 소동파는 ‘훌쩍 세상을 버리고 홀몸이 되어 날개를 달고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오르는 것만 같다(飄飄乎如遺世獨立 羽化而登仙)’고 했다. 우화등선(羽化登仙)은 사람이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감을 이르는 도교적 표현이다.

최치원은 통합의 사상가라 불린다. 유(儒)·불(佛)·도(道)에 대해 그는 ‘길은 각각 다르나 도착지는 같다’고 했다. 그리고 모든 사상·종교·집단이 대립과 갈등 없이 서로 어울려 화목하게 되는 것을 이상으로 여겼다. 각 사상의 특징을 명확하게 인정하면서도 그 개별성보다는 보편적인 성격을 종합함으로써 거국적인 사상적 통합을 시도했던 것이다. 신라의 국운은 날로 기울고 있었다. 그의 사상적 통합은 분산된 힘을 응집하고 민족공동운명체로서의 집단의식을 일으켜 시대적인 현실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가운루와 우화루는 도교 사상이 담긴 이름이다. 부처의 마음과 유교의 정신, 도교적 사상을 넘나들며 그가 품었던 이상 세계로의 간구 또한 깃들어 있다. 최치원이 거쳐 간 이후 ‘높은 구름(高雲)’을 뜻하던 고운사(高雲寺)의 이름은 그의 자(字)를 따 ‘고독한 구름(孤雲)’을 의미하는 고운사(孤雲寺)가 되었다.

#2. 가운루와 우화루

가운루는 등운산 계곡을 가로질러 다리처럼 놓여 있다. 계곡에 기둥을 세워 누각을 떠받치는 모양이다. 가운데 깊은 계곡에는 돌기둥을 세우고 가장자리로는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놓아 주춧돌로 삼았다. 계곡의 생김대로 초석을 놓은 것이다. 그 위에 나무기둥을 올려 균형을 맞추고 누마루를 깔았다. 기둥은 약한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이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이다. 서향인 전면과 남북의 양 측면은 판벽(板璧)으로 막았는데, 전면의 중앙 3칸은 가운데 설주가 있는 쌍여닫이 판창문으로 열었고 양측에는 판문을 달아 누에 들 수 있게 했다. 동쪽을 바라보는 배면은 계자(鷄子)난간을 둘러 개방하였고 누각을 오르내리는 나무계단을 놓았다. 누마루는 통 칸으로 처리해 우물마루를 깔았다. 기둥머리에 새 날개처럼 뾰족하게 생긴 부재를 익공(翼工)이라 한다. 익공이 하나면 초익공, 둘이면 이익공이다. 가운루는 네 모서리 기둥만 이익공, 나머지는 초익공이다. 이는 흔치 않은 형식이라 한다.

이 건물은 후대에 여러 차례 중수되면서 부분적인 변형이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전체적으로 보아 조선 중기의 양식이 지배적이며 숙종 때인 1676년과 1717년의 중수기가 남아 있다. 옛날에는 ‘누각에 서면 아래로는 계류가 흐르고, 뒤로는 찬란한 산들과 구름의 바다를 접하는 신선의 세계’라 했다. 계곡은 대부분 메워져 옛 풍취는 없지만 지금도 누각에 오르면 하늘가에 걸린 등운산 봉우리가 대해의 섬처럼 보인다. 가운루는 그곳을 향해 항해하는 커다란 배처럼 느껴진다. 가허루가 언제 가운루로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가운루에는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누각 바깥 처마에 걸린 행초서 글씨는 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두 번의 내란을 겪고 사랑하는 노국 공주마저 잃은 왕은 전국을 떠돌다 이곳으로 왔다. 그의 글씨에는 구름에 몸을 싣고 세상사를 잊고 싶어한 공민왕의 심경이 담겨 있을 것이다.

우화루는 가운루의 북동쪽에 위치한다. 하나의 사찰에 두 개의 누각은 드문 일이다. 우화루는 정면 6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 건물이다. 가운루를 향하고 있는 정면은 2층 누각의 형태를 취하고 있고 배면은 누마루와 극락전 마당이 접해 있다. 기둥은 모두 원주를 사용했다. 우화루 역시 여러 번의 개창과 중수를 거쳤다. 기록을 보면 1898년 포운(抱雲)과 혜은(惠隱)이 여러 전각과 더불어 중수했으며 2004년에 해체 복원되었다. 누각 안에는 우화루(雨花樓) 현판이 하나 더 걸려 있다. ‘꽃비가 내린다’는 뜻이다. 부처가 설법하자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는 법화경의 가르침에서 온 이름이다. 불교적 의미로는 환생을 뜻한다. 우화루는 현재 조용히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다. 그것은 꽃비를 맞으며 세상을 잊는 시간이다.

#3. 1천여 년이 흐르는 동안

고운사는 최치원이 머물다 간 이후 도선 국사(道詵國師)가 크게 일으켜 세웠다.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조에 걸쳐 여러 번 중창되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사명 대사가 승군의 전방기지로 삼았다. 우화루 곁의 종각을 지나면 고운사의 중심 법당인 대웅보전이 장쾌하다. 1992년에 신축한 건물로 계곡을 메워 너른 앞마당을 펼쳐 놓았다. 대웅보전의 왼쪽은 극락전, 뒤쪽은 약사전, 오른편 돌계단을 오르면 나한전이다. 극락전은 30여 년 전만 해도 고운사의 큰 법당이었다. 약사전에는 보물로 지정돼 있는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나한전은 조선 중기의 건물로 앞뜰에 삼층석탑이 서 있다. 약사전의 부처님과 나한전 앞의 석탑은 도선 국사가 조성한 것들이다.

약사전 맞은편에는 연수전(延壽殿)이 자리한다. 영조 때인 1774년에 왕실의 계보를 적은 어첩(御帖)을 봉안하기 위해 건립한 전각으로, 1902년에는 고종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새로 지었다. 나침반의 바늘이 꼼짝하지 않을 정도로 기가 센 자리라 한다. 경내의 가장 깊은 곳에는 명부전이 자리한다. 약 300년 전에 세워진 법당이다. 세상을 떠나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이렇게 묻는다고 한다. “고운사엔 다녀왔는가?”

일제강점기 동안 고운사는 조선 불교 31총본산의 하나였다. 광복 이후 사찰의 재산이 망실되고 당우는 쇠락했지만 지금은 조계종 제16교구의 본사로 인근의 크고 작은 60여 사찰을 거느리고 있다. 고운사 큰스님의 처소 이름은 ‘고운대암(孤雲大庵)’이다. 암자의 기둥에는 고운사의 한 수도승이 쓴 주련이 걸려 있다. ‘고운사 큰 암자에 가까이 한지 어언 백년 / 고락을 다한 가운데 오래도록 살아왔네 / 풍광도 형체도 무상히 흘러가는데 / 태평한 큰 성품으로 해탈을 이루었네.’ 수도승은 해탈을 이루었는가. 벼슬을 내려놓고 세상을 떠돌던 최치원은 고운사에서 마음을 비웠다고 한다. 그러나 은거의 유랑 중에도 그에게는 신라에 대한 변함없는 자부가 있었다. 그는 다시 산문을 나섰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한국콘텐츠진흥원 자료. 현대불교신문. 이구의, 최치원 문학의 창작 현장과 유적에 대한 연구, 2008. 이재운, 고운 최치원의 사상과 역사인식 연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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