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바다인문학] 거제의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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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2-07   |  발행일 2018-12-07 제38면   |  수정 2018-12-07
알은 담고 내장만 꺼내 말린 ‘약대구’ …보신용 영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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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중앙시장에 만난 약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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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와 가덕도 사이 대구어장, 이수도 뒤쪽으로 보이는 다리가 거가대교다.


연말이 다가오면 시원하고 따뜻한 국물이 그립다. 이럴 때 어김없이 거제로 향한다. 그곳에서 시원한 바다와 섬을 돌아보고, 포구마을 식당에서 끓여주는 대구탕으로 한해 동안 쓰린 속과 고생한 몸을 위로해 본다. 대구가 좋아하는 진해만, 그곳에 대구를 잡아 살아가는 포구마을인 외포와 관포가 있다. 외포는 겨울철이면 대구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식당들이 있고 새벽 어시장과 대구축제도 열린다.

2월까지 제철…거제 포구마을 분주
이수도 덕장 걸린 대구·물메기 눈안에

일제때 일본인이 대구어장 20년 임차
조선 수산왕 불려…어민 불만 극에달해

건조방법·크기·색 따라 다양한 이름
통대구·생대구·건대구·보령대구…
종묘사직·조정 제례 진상‘귀한 대접’

거제vs 가덕, 자망어민vs 호망어민
잡는 사람·방법에 따라 시비도 많아

무없이 대구만 넣고 끓인‘외포대구탕’
반건조 후 포떠서 먹는 ‘마른대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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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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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창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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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대구회.

◆겨울바다의 진객…대구

대구는 북태평양 오호츠크해에서 베링해 사이 바다에서 서식 하다가 겨울철 냉수대가 확대되면서 해류를 타고 울산만과 진해만까지 내려온다. 11월 말부터 2월까지 대구가 제철이다. 이때부터 거제도의 대구잡이 포구마을은 분주해진다. 외포나 관포처럼 대구잡이를 전업으로 하는 마을 주민들은 한철 대구를 잡아 일년을 먹고 산다. 제대로 자란 대구는 1m에 이르며 무게도 20㎏이나 된다. 세계에서 가장 큰 대구 기록은 1.19m에 22.7㎏.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창원, 거제, 진해, 고성, 사천에서 많이 잡힌다고 했다. 지금 진해만을 일컫는다. 일제강점기에는 부산서쪽 다대포만, 마산만, 진해만, 고성만, 거제도 일대에서 어획되었다. 진해만은 우리나라 최고의 대구어장이다. 특히 가덕도와 거제도 사이, 최근에는 가거대교를 건너 칠천도 주변 바다에서도 대구가 많이 잡히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전체 대구 어획량을 살펴보면 거제나 부산보다 충남을 중심으로 한 서해안이 더 많다. 그래도 겨울 대구의 고장은 역시 거제다. 그 중심은 외포, 관포, 이수도 등이다.

이수도로 가는 배에는 겨울인데도 많은 여행객이 타고 있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것이 덕장에 걸린 대구와 물메기들이다. 꾸덕꾸덕 마르는 대구 사진을 찍고 있는데 “왜 사진을 찍느냐”며 주민이 다가와 채근하듯 묻는다. 난 무척 당황했다. 대구에 초상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서 찍는 것이라 문제될 것 없다고 생각했는데…. 주민들이 사진 찍는 것에 민감했던 이유를 나중에 알았다.

◆일본…거제바다를 탐하다

대구를 잡는 전통어법은 ‘어전’이다. 어전은 조기, 대구, 청어처럼 산란을 위해 연안으로 군집을 이루어 이동하는 어류를 포획하는 전통어법이다. 지역에 따라 어살, 방렴 등이라고도 한다. 돌로 막은 석방렴(독살), 대나무로 막는 죽방렴 등이 대표적이다.

대구는 거제를 대표하는 시어(市魚)다. 조선시대에도 거제지역 특산물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장은 일반인이 소유할 수 없었다. 1906년 ‘칙지’(대한제국에서 내리는 문서)에 따르면 거제도, 가덕도, 가조도 등 ‘어기(어장)’를 의친왕부로 귀속시킨다고 명시했다. ‘어기파원’이라는 관리를 보내 어장을 관리했다.

칙지로 대구어장이 왕실 재산처럼 명시화되면서 오래도록 대구를 잡아온 지역 어민들과 분쟁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왕실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절친이었던 가시이 겐타로에게 대구어장을 20년 기한으로 임차해줘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겐타로는 진해만 일대 모든 어장을 임대한 것처럼 행동했다. 당시 거제도에 55개소, 가조도 10개소, 가덕도 7개소 등 70여개의 어장이 있었다. 겐타로는 이 어장을 어민들에게 입찰경매하면서 가격경쟁을 시켜 임대료를 해마다 올렸다. 어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해 탄원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세금이 첫해에 비해 수십 배에 달해 살 수 없다’면서 연서한 탄원서를 조선총독부와 왕실에 제출했다는 기사도 실렸다.(동아일보, 1925년 1월11일자)

겐타로는 후쿠오카현에서 태어나 1904년 러일전쟁 당시 거제도에서 군용어류 통조림사업, 왕실 대구어장 임차, 고등어 건착망 사업 등에 투자했다. 조선에서 ‘수산왕’으로 불렸던 재력가다. 나중에 일본인을 지원하는 단체인 부산지역의 세화회 초대회장을 맡기도 했다. 광복 후에도 조선은 물론 바다까지 계속 소유하며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종묘사직에서 김약국까지

대구는 일찍부터 귀한 대접을 받았다. 건대구나 반건대구는 물론 어란해(알젓)와 고지해(이리젓) 등이 진상됐다. 또한 종묘사직과 조정 제례에도 진상품으로 들어 온 대구를 사용했다. 중국 황제의 장례식이나 즉위식, 그리고 혼례에서도 말린 대구를 보냈다.

대구는 건조방법, 크기, 색 등에 따라 이름도 다양하다. 아가미와 창자를 빼내고 말린 ‘통대구’, 배를 가르지 않고 알대구의 아가미와 창자를 입을 통해 빼낸 후 소금을 넣어 말린 ‘약대구’ 등을 갈라 뼈를 제거하고 머리도 반으로 잘라 햇빛에 말린 ‘열작’, 생물인 ‘생대구’, 햇볕에 건조시킨 ‘건대구’, 크기가 작은 ‘보령대구’, 한 자 이상 큰 ‘도령대구’, 암컷인 ‘알대구’, 수컷인 ‘곤이대구’, 노랗게 말린 ‘황대구’, 하얗게 말린 ‘백대구’ 등 끝이 없다.

알을 담은 채 내장만 꺼내고 소금을 집어넣어 말린 약대구는 약이자 보신용 영양식품이다. 약대구는 부잣집에서나 맛볼 수 있었다. 박경리의 단편소설 ‘김약국의 딸들’을 보면 약대구는 알을 빼지 않고 온통 소금에 절였다가 여름에 내기도 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돈이 있는 통영 여자들은 약대구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 이를 ‘앉은장사’라 했다. 즉 대구철에 수백 마리를 사들여 큰 독에 알과 아가미를 따로 넣어 젓을 담갔고 나머지는 통대구로 팔았다. 특히 약대구는 곱으로 남는 장사였다.

◆거제대구 & 가덕대구

진해만 대구를 두고 거제대구냐 아니면 가덕대구냐를 놓고 시비를 많이 벌인다. 거제 뱃사람이 잡으면 거제대구. 가덕 뱃사람이 잡으면 가덕대구다. 잡는 방법을 둘러싸고 어민끼리 갈등을 빚기도 한다. ‘자망’ 어민과 ‘호망’ 어민 사이의 갈등이다. 호망은 길그물 끝에 헛통을 설치해 그곳에 자루그물을 달아 어군을 유도해 포획하는 어업이다. 정치망으로 거제도와 가덕도 일대의 어장에서 대구를 잡을 때 사용하는 그물이다. 거제 일대에서 어획량은 자망을 이용한 게 절대적이다. 허가 건수가 많고 거제 바다를 오가며 그물을 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다. 반대로 호망은 겨울철 짧은 기간에 집중적으로 대구를 잡는다. 그물도 크고 상처가 없는 살아 있는 대구를 잡기에 값도 좋다. 소득에선 자망을 앞선다. 대신에 호망은 정치망이라 지정된 곳에 설치해야 한다. 호망은 대구만 잡는데 자망은 대구를 포함해 다른 어종까지 잡는다.

대구를 가장 많이 찾는 1월은 산란기. 그래서 금어기다. 자망은 이 시기에 어족자원 보호를 위해 포획을 금지한다. 하지만 호망은 인공수정을 위해 대구잡이를 허가하고 있다. 한 척당 700마리로 한정한다. 이 시기에는 오직 호망으로 잡은 대구만 꼬리에 인증표식을 달고 유통된다.

대구의 남획으로 1970년대 어획량이 급격하게 감소한다. 80년대부터 인공방류 사업을 시작했다. 90년대 후반 대구가 귀해지면서 한 마리에 30만~40만원에 거래되기도 했다. 이때부터 성어를 잡아 인공수정을 시킨 후 치어를 방류시켰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다시 자원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대구가 잘 보이지 않았던 거가대교 서쪽 칠천도 등 진해만 안쪽에서 대구가 잡히기 시작했다. 이러다 보니 대구만 잡아야 하는 호망 어민들은 대구를 찾아 이동할 수밖에 없는데 정치망이라 이동할 수 없는 처지다. 자망이나 통발이나 연승어업을 하는 어민들은 호망 때문에 조업을 할 수 없다면서 민원을 제기하고 있다. 호망 어민들도 며칠 조업이면 할당량에 이르기 때문에 남은 기간 불법이 아니면 조업을 할 수 없다. 이수도에서 만난 그 주민이 사진을 찍는 것에 민감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런 대구를 역사의 전환기에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작품이 마크 쿨란스키가 지은 ‘대구’라는 책이다. 그는 “세계 역사와 지도가 대구 어장을 따라 변해왔다”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말린 대구는 바이킹의 활동, 영국 신교도의 신대륙 발견, 서인도 제도의 플랜테이션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긴 항해·값싼 노동력·척박한 환경을 유지하는 식량이었다. 또 대구의 대표적 서식지였던 아이슬란드는 세 차례에 걸쳐 영국 등과 ‘대구전쟁’을 벌였다. 그 결과 국제해양법상 경제수역이 200마일로 정해지는 계기가 된다.

진해만에서도 사라질 위기에 처한 대구자원을 회복하는데 10여년의 기간이 필요했다. 거제시는 2016년 거제대구를 지리적표시 단체표장으로 등록했다. 그리고 대구를 시어로 지정하고 외포를 중심으로 12월이면 대구축제도 개최한다.

이제 먹기만 하는 축제에서 탈피했으면 좋겠다. 대구축제는 대구잡는 축제가 아니다. 바다와 어민,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질서를 마련하는 축제가 되어야 한다. 바다를 살리는 그물이 간절하기만 한 시절이다.

◆대구 관련 음식

대구떡국, 대구찜, 대구탕, 대구조림, 대구구이 등 대구를 이용한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 그래도 겨울철에는 맑은 대구탕이 최고다. 외포의 대구탕은 대구만 넣는다. 무도 필요 없이 대구만 넣어 끓인다. 인상적인 대구요리는 통영음식을 연구하는 이상희씨가 내놓은 ‘마른대구회’다. 반쯤 건조된 대구를 포떠서 회처럼 먹는다. 일본에는 아오모리 향토음식인 ‘자파지루’가 있다. 대구 뼈와 머리와 내장, 거기에 무와 두부를 넣고 소금과 된장으로 간을 한 후 파를 곁들인 탕이다. 우리의 대구탕과 비슷하다. 영국을 대표하는 ‘피시앤칩스’의 생선도 대구다. (광주전남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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