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과 책상사이] 고독한 방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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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2-10 07:58  |  수정 2018-12-10 07:58  |  발행일 2018-12-10 제18면
[밥상과 책상사이] 고독한 방랑자

동트기 직전 마당에 나서니 오리온 별자리가 아름답다.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책을 읽었다.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는 언제나 나를 들뜨게 한다. 여러 번 읽었지만 일단 잡으면 여전히 중간에 그만둘 수 없는 책이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거부하는 시인이자 고독한 방랑자인 크눌프는 모든 종류의 안일과 안식, 애착과 집착을 버리고 홀로 방랑을 계속하면서 늘 새롭게 느끼고 경험하며 삶을 통찰하고 사색한다. 그는 세상일에 지칠 때마다 내가 달려가서 기대는 인물이다. 그는 어떤 것에도 구속받거나 얽매이지 않는다. 그는 순간을 위해 모든 것을 거는 나그네다. 자신이 마주하는 현재의 모든 순간이 그에게는 영원의 가치를 가진다. 그는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머무를 곳을 찾기 위해 이동하는 것이 아니고, 이동하기 위해서 정주하고 머무르는 존재다.

크눌프는 무의미와 실속 없음의 대명사다. 그의 삶은 얼핏 보면 생산성이 없다. 비효율의 극치다. 사회가 이런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다면 몰락과 쇠락을 면할 수가 없을 것이다. 크눌프 자신도 안다. “나는 일생을 잘못 걸었다”라고 후회한다. 그러나 신은 스스로 실패자라고 자책하는 그를 오히려 다독여준다. “나를 대신하여 너는 방랑하였고, 안주하여 사는 자들에게 늘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일깨워 주었다”라고 위로해 준다. 크눌프는 모든 인간에게 가슴을 열고 친구가 되려고 노력했고 다정한 이웃이 되려고 했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모든 사람에게 말을 걸고 그들을 자신의 친구로 삼았으며, 모든 소녀와 여인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매일매일을 일요일처럼 살았다.” ‘크눌프’를 다시 읽으면서 이 구절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헤세는 ‘어느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크눌프 같은 인물이 저를 사로잡습니다. 그들은 ‘유용’하지 않지만 해롭지도 않습니다. 유용한 인물보다는 훨씬 덜 해롭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바로잡는 일은 나의 몫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약 크눌프처럼 재능 있고 영감이 풍부한 사람이 그가 사는 세계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면 크눌프뿐만 아니라 그 세계에도 책임이 있습니다”라고 썼다. 헤세가 살던 시대나 지금이나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또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수능성적 발표 이후 수험생과 학부모, 교육종사자들은 대학과 학과의 서열을 따지는데 정신이 팔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나 역시 그렇게 살고 있다. 소수의 승자를 더 빛나고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나머지 사람을 들러리로 경시하는 사회는 희망이 없고 불행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다. 우리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현실을 늘 목격하고 있다. 상심하는 젊은이들이여, 헤세의 ‘크눌프’를 손에 들고 하루라도 일상에서 벗어나 보자. 겨울 언덕에 외롭게 서있는 소나무를 바라보며 그 기개를 배우고, 칼날 바람 불어오는 강둑에 서서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다시 마음을 다잡고 찬란한 봄날을 꿈꾸어 보자.

윤일현<지성교육문화센터이사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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