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진단] ‘보헤미안 랩소디’는 따뜻했다

  • 장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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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2-11   |  발행일 2018-12-11 제30면   |  수정 2018-12-11
정권마다 말한 포용과 겸양
입맛 맞는 부류에게만 해당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처럼
좋은 기억을 선사하는 정치
우리는 정말 기대할수 없나
[화요진단] ‘보헤미안 랩소디’는 따뜻했다

구슬치기·딱지치기·비석치기·자치기·사방치기…. 동네마다 다르게 불렸지만 왜 ‘~치기’라는 이름이 붙었는지는 생각해본 적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냥 동네형들이 그렇게 불렀고, 우리도 동생들에게 그대로 전해주며 즐겼다. 구슬 중에는 실보배·불보배 등으로 불리며 귀한 대접을 받았던 녀석들이 있었다. 비석치기를 할 때 잘 안넘어지고 잘 맞히는 돌은 그저 보물이었다. 적어도 그 시절 꼬맹이에겐 최고의 가치였고 가장 소중한 재산이었으며 40여년이 흐른 지금도 따스하고도 아련한 추억의 편린으로 자리잡고 있다.

개봉한지 한달여쯤 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여전히 뒷심을 발휘하고 있는 모양이다. 1970년대 초반에 결성된 영국의 록그룹 ‘퀸’을 소재로, 보컬과 피아노를 담당했던 프레디 머큐리의 라이프스토리를 조명했다. 앨범 타임라인 등이 왜곡됐다는 합당한 지적이 있긴 하지만 다양한 세대로부터 호평을 받으며 개봉 3주 만에 관람객 600만명을 돌파하는 저력을 보였다.

특히 40~50대의 감성을 자극했고 그들의 추억을 소환해냈다. 가사를 몰라도 멜로디에 몸을 맡기고 ‘콩글리시’로도 분위기를 탈 수 있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오롯이 본인만의 힐링이면 된다. 타인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않았음에도 내 감정과 기억에 개입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일어나선 안된다. 누군가가 “영화는 보는 것으로 이해하고 듣는 것으로 느낀다”고 했다. 액면 그대로만 보고 들은 사람이 가슴으로 이해하고 느낀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말 잘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애나 어른이나 툭하면 가르치려 든다. 피곤하다. 상종하지 않으면 동의한 것으로 간주돼 어느새 같은 편으로 분류된다. 이들 중 상당수는 그들만의 원칙없는 쪼개기와 분석에 능해서 사람들을 혹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본질과 상관없이 의식을 지배하고 싶고, 더러는 목적을 달성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개 얄팍한 지식과 책임지지 않는 이론이 사실상 전부여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곳곳에서 사달이 나기 일쑤다. 자기만의 시각으로 상대방과 사회를, 그리고 지금의 잣대로 과거를 재단한다. 참으로 불편하다. 입으로는 소통을 강조하지만 소통을 외치는 상당수는 불통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독일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니체는 ‘믿음은 거짓보다 더 위험한 진실의 적’이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권리와 책임의 무게는 같아야 한다. 언변이 좋다고, 힘을 가졌다고, 돈이 많다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더 많은 책임감이 요구되지만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은 게 현실이다. 계도와 선동, 소통과 불통, 권리와 의무 사이를 편한 대로 휘젓고 다닌다. 전형적인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다. 역대 모든 정권은 포용과 겸양을 말했지만 결국 정권의 입맛에 맞는 부류만 해당됐다. 어제의 블랙리스트는 오늘의 화이트리스트였고, 아마 내일의 블랙리스트일 것이다. 역사는 돌고돌지만 언제나 스승이다.

깊은 물과도 같은 국민 대부분은 반목과 질시가 횡행하는 상황을 매우 우려하고 있다. 나이별·성별·계층별 등 각계각층의 분열이 예전과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오가는 논쟁의 내용에는 이미 본질이 사라져 있다. 모든 다툼의 시작은 사건이나 사안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 대상은 반드시 사람으로 변질되기 마련이다.

영화 한 편으로 잠시나마 즐겁고 따뜻했던 느낌을 받은 것은 행운이었다. 그 시절 학교 앞 냉차아저씨가 비위생적이기 때문에 신고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1도 해본 적이 없다. 그렇게 커보이던 학교운동장도 지금 보면 작다. 한 반에 60~70명씩 수업을 했어도 공부 못해서 혼난 기억을 빼면 살가운 친구들이 먼저 떠오른다.

우리 정치가 좋은 기억을 선사해 준 적이 있을까 떠올려 봤지만 부질없었다. 위정자는 국민들이 잘먹고 잘살도록 성과를 내면 표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자기 자식 밥도 못 먹는데 옆집아이 디저트 생각한다면 과연 옳은 일일까. 더 이상 ‘그때가 좋았다’는 말이 안나왔으면 진짜 좋겠다.

장준영 (교육인재개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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