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8] 대구의 자부심 국채보상운동<6> 안중근 의사와 가족들의 국채보상운동 참여

  • 뉴미디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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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2-18   |  발행일 2018-12-18 제14면   |  수정 2021-06-22 18:08
안중근, 관서 지부장 맡아 “나라빚 갚자” 호소…가족 설득해 패물도 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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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매일신보 1910년 1월30일자에는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와 안 의사의 부인, 제수들이 시집올 때 가지고 온 패물을 국채보상운동 의연금으로 내놓았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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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가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이는 안 의사에 대한 보편적 이미지가 대한제국 몰락의 원흉을 처단한 열혈 독립투사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 의사는 국채보상운동이 범국민운동으로 전개될 때 ‘국채보상관서동맹회’를 설립하고 지부장을 맡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 국채를 갚기 위한 의연금 모집 독려에도 누구보다 앞장섰다. 특히 그의 가족들도 국채보상운동에 솔선수범했다. 당시 각종 교육사업으로 형편이 녹록지 않았지만, 안 의사의 부인과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 등은 주저없이 집안의 모든 패물을 내놓아 나라빚을 갚는데 보탰다. ‘대구의 자부심! 유네스코가 인정한 국채보상운동’ 시리즈 6편은 국채보상운동의 열기가 들불처럼 번져나가는데 주력한 안중근과 그의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다.

“1천3백만원 속히 갚아야만 한다
노예국이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
안중근, 평양 명륜당 연설에 감동
참석한 선비 의연금 400여원 모아

“나라가 망하게 된 지경인데
패물을 아끼어 무엇에 쓰겠소”
부인과 집안여성 주저없이 내놔

지지자인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부인회’ 통해 적극적으로 참여
회원들 금은 모아 빚 갚기에 보태



#1. 평양 명륜당에 피어오른 뜨거운 불꽃

1907년 2월이었다. 안중근이 서른의 나이로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사살한 날이 1909년 10월26일이니, 역사적인 그날로부터 약 2년 하고도 8개월 전인 셈이었다.

대구 ‘국채보상회’ 본부의 서상돈 회장에게 긴급한 연락이 하나 전해져왔다. 북방의 안중근으로부터였다. 이때 안중근이 드러낸 뜻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국채보상회 관서지부를 개설코자 합니다.”

즉 관서지방에 ‘국채보상회’지부를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관서(關西)란 한반도의 북서부, 구체적으로 현재의 평남·평북·평양·자강도 일대를 가리켰다. ‘국채보상회’로서는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국채보상운동의 불꽃이 북방에서도 타오르기 시작했다는 데 외려 감사한 마음으로 환영할 일이었다.

이로써 1907년 3월1일, 평양에 ‘국채보상관서동맹회’가 조직되었다. 오대규, 허숙, 최경식, 김학선, 이기세, 정용기 등 19명의 발기인이 주도한 가운데 안중근이 지부장을 맡았다. 아울러 ‘국채보상관서동맹회’는 취지서를 발표해 지역민들에게 알렸다.

“1천300만원을 속히 갚아야만 합니다. 이집트와 같은 노예국이 되어선 결코 아니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를 건설하는 데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었다가 파산에 이르면서 영국의 보호령이 된 상태였다. 영국이 막대한 자금을 들여 수에즈 운하 법인의 주식을 사들인 때문이었다. 말이 보호령이지, 식민지나 마찬가지였다. 대한제국이 처한 상황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니 그와 같이 되지 않으려면 국민을 향해 간절히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국채는 국민된 도리로 반드시 갚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국채보상관서동맹회’는 일주일 뒤인 3월8일, 평양의 명륜당(明倫堂)에서 대대적인 모임을 개최하였다. 평양민회를 통해 소식을 접한 1천여 명의 선비들이 자리를 빼곡하게 채웠다. 이 자리에서 안중근은 국채보상에 대한 국민의 의무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였다. 스물여덟 살 열혈 애국청년의 뜨거운 목소리에 감화와 감동을 받은 이들이 주머니를 열기 시작했고, 무려 400여원의 의연금을 거두는 성과를 이뤘다.

그런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일본인 형사가 안중근을 찾아와 따져 물었다.

“회원은 몇 명이 모였고 재정은 얼마나 거두어졌는가.”

안중근이 서늘한 얼굴로 대답했다.

“회원은 2천만명이요, 재정은 1천300만원을 거둘 것이니, 그로써 보상하려 한다.”

대한제국의 전 국민이 회원이라는 뜻이었다. 일본인 형사가 비웃으며 욕을 내뱉었다.

“한국인은 하등한 민족이다. 주제에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분위기가 험악해졌지만 안중근은 물러서지 않았다.

“빚을 진 사람은 빚을 갚고 빚을 준 사람은 빚을 받는 것일 뿐이거늘, 거기에 무슨 불미한 일이 있어 이처럼 질투하고 욕질을 하는지 모르겠다.”

일본인 형사가 붉으락푸르락 화를 내더니 안중근에게 달려들었다. 안중근이 외쳤다.

“이처럼 별 까닭도 없이 욕을 본다면, 장차 2천만 대한 민족이 큰 압제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찌 나라의 수치를 달게 받을 수 있겠는가.”

싸움이 커질 듯하자 곁에 있던 사람들이 말리고 나섰다. 씩씩거리며 돌아간 일본인 형사의 뒤에서 안중근이 주먹을 쥐었다. 이 이야기를 안중근은 훗날 ‘안응칠 역사’에 기록해두었는데, 여기서 안응칠은 안중근의 아명이었다.

아울러 역사학자이자 국어학자로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계봉우(桂奉禹)는 “안중근이 1907년 평양 명륜당에서 뜻있는 선비 천여 명을 모아 의연금을 크게 거두었으니, 이것은 나라를 사랑하는 충성이니라”라고 하며 국채보상운동에서 안중근이 어떻게 활약했는지를 널리 소개하였다.



#2. 혼자서가 아니라 모두 함께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던 당시 안중근은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은 상황이었다. 내막은 이러했다.

1906년, 안중근은 집안의 재산을 정리하여 평안남도 진남포에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세워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 집중해 있었다. 아울러 해체 직전의 ‘돈의학교(敦義學校)’까지 재설립하여 열정을 다하고 있기도 했다. 돈의학교는 진남포 천주교회가 1900년 진남포에 세운 초등교육기관으로 1906년 즈음부터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던 상태였다. 게다가 2대 주임신부인 르레드 신부가 교육활동에 열의가 없어서 문을 닫기 직전이었던 바, 천주교 신자로 ‘도마’라는 세례명까지 있던 안중근이 발 벗고 나선 것이다.

당연히 재정 문제가 부상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안중근은 재정에 보탬을 주기 위해 평양에 가서 석탄광 채굴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일본인의 방해로 수천원의 손해만 보고 말았다. 그 와중에 국채보상운동 소식이 들려왔으니 안중근으로서는 애가 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국채보상운동은 신분과 성별과 나이는 물론이거니와 외국인과 내국인의 구별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범국민운동이었다. 혼자서가 아니라 함께 나서야 했다.

이에 안중근은 가족들에게 일렀다.

“국사(國事)는 공(公)이요, 가사(家事)는 사(私)이다. 국채보상관서동맹회 지부장인 내가 우리 가정과 더불어 솔선수범치 아니하고는 결코 다른 사람을 지도할 수 없다.”

이어서 국채보상운동의 취지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일제의 경제적 침략에서 벗어나려면 국채보상운동이 성공해야 한다. 그런데 국채보상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가족의 지원과 참여가 필수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가족 가운데 여성들을 향해 덧붙였다.

“나라가 망하게 된 지경인데 패물을 아끼어 무엇에 쓰겠소.”

그러자 안중근의 부인은 물론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와 두 제수까지 기꺼이 나섰다. 특히 부인과 제수들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패물 등을 주저하지 않고 내어놓았다.

뿐만 아니라 안중근의 든든한 지지자이자 버팀목이었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는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佩物廢止夫人會)’를 통해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는 “1천만 여성이 1인당 2원 이상의 의연금을 내면 3천만원 정도가 될 것이니 1천만원은 나라의 빚을 갚고 1천만원으로는 은행을 설립하고, 1천만원으로는 학교를 설립합시다”는 취지 아래 설립된 여성 단체였다. 회원 모두가 금은, 패물 등을 일절 착용하지 않기로 규칙을 정하고 가지고 있던 패물을 팔아 국채보상의연금을 냄으로써 관서의 다른 지역에 미친 영향이 컸다.

안중근의 가족들이 의연한 내용도 바로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 제2회 의연’ 소식란에 실렸다.

“안중근 모친 은지환 2쌍 넉 냥 닷 돈 쭝은 아직 팔리지 못하였음. 은투호 2개, 은장도 1개, 은귀이개 2개, 은가지 3개, 은부전 2개 등은 합이 십 종 넉 냥 닷 돈 쭝 대금 20원.”

그야말로 집안에 있던 은붙이란 은붙이는 모두 나온 것이다. 이와 같은 안중근 가족의 적극적인 의연 소식은 곧바로 다른 관서지역에 널리 전파되었고, 이에 감동받는 주민들에 의해 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이 활성화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국채보상운동에의 동참은 안중근의 집안에서 그치지 않았다. 안중근이 재산을 털어 세운 학교도 함께 나선 것이다. 바로 삼흥학교로, 1907년 4월 중순 학교의 교직원과 학생들 또한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교감 직을 맡고 있던 안중근 본인을 비롯해 교장 한재호, 총무 김경지, 찬성 고우정, 교사 김문규 등과 학생 27명이 나란히 이름을 얹은 것이다. 27명의 학생 가운데는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모은 액수는 34원60전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그야말로 관서지방의 국채보상운동은 안중근을 중심으로 안과 밖이 혼연일체가 되어 돌아간 것이다.

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참고=독립기념관, 통권 제301호. 세계가 주목하는 국채보상운동, 나눔과 책임연구소. 국채보상운동 100주년 기념 자료집, 대구시. 대한매일신보 1910년 1월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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