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남 함양 하미앙 와인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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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2-21   |  발행일 2018-12-21 제36면   |  수정 2018-12-21
어릴적 산머루 따먹던 달콤한 기억…와인으로 다시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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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와인은 병에 담아 눕혀 놓는다. 깊은 맛을 얻기 위해 3년 이상 숙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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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미앙 레스토랑. 식사와 시음, 와인 구입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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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풍의 하미앙 와인밸리. 산머루로 와인을 만드는 양조장으로 삼봉산 중턱에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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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동굴 가는 길. 오른쪽은 족욕 체험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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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동굴에서 지상으로 나가는 계단. 자작나무는 강원도에서 온 것.

■ 시목마을의 노부부 이야기

그리 오래지 않은 옛날, 시목마을에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허두천 할아버지와 다리를 쓰지 못하는 이옥금 할머니가 초가집을 개량한 낡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노부부는 논을 일구며 근근이 살면서 30여 년 동안 300만 원을 모았는데, 자신들의 장례비용이었다. 그 돈은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유가족들에게 보내졌다고 한다.

함양 읍내 로터리마다 ‘메리 크리스마스, 해피 뉴이어’ 메시지가 조용히 흥겹다. 흥은 멋쩍게도 금세 내려앉고, 골짜기를 흐르는 국도에는 커다란 산들의 점잖은 눈길이 묵직하다. 서쪽의 남원으로 통하는 24번 국도. 오른쪽은 오봉산(五峰山), 왼쪽으로는 삼봉산(三峰山)이 높다. 산들은 길처럼 동서로 길다. 시목, 양동마을 이정표를 따라 삼봉산으로 든다. 옛날 허준이 약초를 찾아 올랐다는 산, 이곳에 산머루로 와인을 만든다는 양조장이 있다. 이름도 예쁜 ‘하미앙(Hamyang)’.

프랑스어처럼 발음하는‘하아미이양’
유럽 농장에 온듯한 ‘와인밸리’ 풍경

해발 500m 지리산 자락 재배한 산머루
저장실 꽉찬 오크통 100개·와인 3만병
깊은 맛 얻기 위해 3년이상 숙성과정
족욕장·동굴·갤러리·레스토랑 마련
시음·판매·체험장 등 다양하게 즐겨


◆하미앙 와인밸리

길은 쑥 내려가 제법 너른 계곡을 건넌다. 돌들은 희고 물은 투명하다. 계곡에 놓인 콘크리트 시목교는 1994년에 완공되었단다. 그 전에는 어떻게 건너 다녔을까. 층층 다락논을 바라보며 집들이 옹기종기 앉았다. 함양읍 죽림리의 자연부락인 시목마을이다. 마을회관을 지나 양동교를 건넌다. 이제 양동마을이겠지. 그러나 집들은 거의 보이지 않고 산길은 삼봉산의 허리춤을 더듬으며 천천히 올라간다. 길 곳곳에 이정표가 있다. ‘하미앙 와인밸리’ ‘밸리(Valley)’라는 이름답게 하미앙은 해발 500m 진짜 산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다.

하-아-미-이-양. ‘함양’을 천천히 주욱 늘여 프랑스어처럼 발음한 것이 ‘하미앙’이다. 외국인도 쉽게 발음할 수 있도록 풀어 썼다. 하품처럼 나른하고 고양이처럼 앙증맞다. 하미앙은 산머루로 와인을 만든다. 산머루는 해발 400~600m 고지의 서늘한 기후에서 자생하는 자주빛의 새콤달콤한 열매로 산중의 보배라 일컫는다. 고려 왕건이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에게 선물한 것이 머루주였을 만큼 역사도 오래 되었고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 10대 장수식품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미앙의 산머루는 해발 500m 고지의 지리산 자락에서 재배된다. 인근의 50여 농가가 계약재배로 참여하는데, 연간 100t에서 150t의 산머루를 생산한다. 생산된 산머루가 와인으로 탄생하는 곳이 하미앙 와인밸리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홍보관과 와인으로 족욕을 하는 체험장이다. 홍보관 뒤로 가공생산실이 있고 그 옆에 숙성실이 있다. 족욕장 위로는 와인 동굴과 갤러리, 레스토랑이 이어진다. 와인은 고대 로마인들의 음료였다. 로마군의 원정길에 항상 함께한 것이 와인이었고 점령지마다 심은 것이 포도나무였다. 지금 유럽 각지에 펼쳐져 있는 포도밭의 개척자가 로마군인 셈이다. 하미앙 와인밸리의 건물들은 모두 유럽풍이다. 유럽의 어느 농장에 온 듯한 느낌을 주고자 하는 노골적인 솔직함이 있다.

◆술이 익어가는 곳

덕유산이 육십령을 거쳐 남쪽으로 내달은 것이 삼봉산이다. 남쪽으로는 지리산으로 이어진다. 삼봉산은 산의 모든 사면이 급경사를 이루는데 하미앙의 와인 저장고와 숙성실은 그러한 산의 경사를 이용해 만든 굴이다. 굴은 와인의 숙성에 적합한 온도와 습도를 제공한다. 서늘하고 어둑한 와인 숙성실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숙성 탱크가 20여 개 줄지어 서 있다. 탱크 하나에 750mℓ 기준 와인 1만 5천병을 담을 수 있는 규모라 한다.

탱크에서 발효가 종료된 와인은 오크통으로 이동한다. 와인과 오크가 만나면 맛은 부드럽고 풍미는 커진다. 와인의 색은 더 깊어지고 오크 특유의 향이 더해진다. 노란 전등이 포근한 빛을 발하는 아치형의 와인동굴에는 오크통 100개와 와인 3만병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오크통 1통은 와인 300병 분량이다. 와인과 오크의 만남은 6개월에서 1년. 이후 오크와인은 병에 담아 코르크 마개로 막고 눕혀 놓는다. 1년 정도 숙성되면 맛이 들지만 깊은 맛을 얻기 위해 3년 이상 숙성한다. 고요하다. 걸음이 미안해진다. 와인은 햇빛을 싫어하고 움직이는 것도 싫어한다고 한다. 그는 어둠을 좋아하는 차분하고 조용한 스타일이다.

◆6차 산업의 롤 모델

와인동굴 안에서 지상으로 곧장 오르는 계단이 있다. 계단실에는 자작나무 키 큰 가지가 숲을 이루고 있다. 너는 베어져도 부드러운 피부와 흰 빛깔을 잃지 않는구나. 지상으로 나가면 동선은 작은 갤러리를 거쳐 레스토랑으로 이어진다. 갤러리에는 산머루에 관한 이야기, 이곳을 다녀간 사람 등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와인밸리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레스토랑에서는 와인을 시음할 수 있고 구입할 수도 있으며, 식사도 할 수 있다. 레스토랑 오른쪽의 햇빛이 가득 차있는 방은 체험장이다. 나만의 와인 만들기, 산머루 비누 만들기 등 대상 별로 프로그램이 다양하다.

하미앙의 주인은 이상인, 석미숙 부부다. 1985년에 귀농해 농사를 짓다가 실패의 쓴 맛을 많이 봤다. 그러다 문득 어린 시절 지리산을 누비며 산머루를 따 먹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미앙의 시작이다. 계속 꽃길만 걸었던 것은 아니다. 파산의 위기도 있었지만 지금 하미앙 와인밸리는 6차 산업의 롤 모델로 꼽힌다. 1차 산업은 농산물의 생산이다. 2차 산업은 제조 및 가공, 생산된 제품이 체험 및 관광·서비스 등과 연계되면 3차 산업이다. 농업 6차 산업은 1·2·3차 산업의 융·복합을 통해 농촌의 부가가치를 높이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산업을 말한다. 1, 2, 3은 더해도 6, 곱해도 6이다. 그래서 6차 산업이라 한단다. 하미앙은 그간 대통령 표창을 비롯해 여러 상을 받았고, 쌉싸름한 드라이 와인은 ‘2007 코리아 와인 챌린지’에서 세계 각국의 와인과 경쟁해 동상을 수상했다.

하미앙 레스토랑 앞에서의 조망이 멋지다. 멀리 함양읍내까지 시선이 열려 있고 마주한 오봉산을 바라보면 눈이 맑아진다. 오봉산 아래 깊은 골짜기에서 이성계가 왜장 아지발도를 죽였다지. 오봉산 넘어 삼봉산 중턱을 휘갈기는 바람은 칼날 같지만, 왼쪽 팔목에 걸린 묵직한 와인 한 병에 마음은 든든하다. 흥이 난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정보

광주∼대구고속도로 광주방향으로 가다 함양IC로 나간다. 함양읍 방향으로 가 24번 남원방향 국도를 타고 가면 된다. 시목, 양동마을 이정표를 따라 들어가면 길 곳곳에 하미앙 이정표가 있다. 기독교 공동체인 두레마을 표지석을 지나 조금 더 오르면 두레교회와 다볕골 노인 요양원이 있고 그 바로 위에 하미앙 와인밸리가 위치한다. 연중 무휴 무료견학이다. 누구나 자유롭게 농장을 둘러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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