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날씨를 느껴도 같은 예술과 표현은 없었다

  • 최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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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2-29   |  발행일 2018-12-29 제16면   |  수정 2018-12-29
예술가들이 사랑한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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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휘슬러는 밤 안개를 표현하는 걸 유독 좋아했다. 제임스 휘슬러의 ‘야상곡 : 푸른빛과 은빛 베터시 곶’. <펄북스 제공>


英 셰익스피어부터 이언 매큐언까지
문학·예술 속 변화무쌍한 날씨 다뤄

토머스 하디, 빗속 걷는 고단함 불평
찰스 디킨스는 빗소리를 시곗소리로
존 러스킨, 하늘·구름 향한 열정 보여
제임스 휘슬러는 밤 안개 최고로 꼽아

5세기 중엽엔 추위·얼음 묘사에 몰두
13∼14세기 서정시는 온화한 분위기


영국인에게 날씨는 중요한 대화 주제다. 전혀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 처음으로 대화를 할 때 가장 쉽게 시작하는 이야기가 날씨 이야기다. 영국의 날씨가 워낙 변화무쌍하기 때문일까. 날씨와 관련된 단어를 익혀둔다면 영국인과 대화를 꽤 길게 이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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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라 해리스 지음/ 강도은 옮김/ 펄북스/ 732쪽/ 4만2천원

이 책의 저자는 영국의 영문학자다. 그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영국의 문학과 예술에서 엿볼 수 있는 날씨를 책에서 다루고 있다. 날씨를 대하는 예술가들의 태도가 그들의 작품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들여다본다. 셰익스피어와 브론테 자매부터 버지니아 울프, 이언 매큐언 등 영국의 대표 문학가들을 중심으로 이들이 바라본 날씨를 이야기하는 책이다.

저자는 크리스마스 한 주 전 16세기 지어진 한 탑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추위로 잠이 깬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20년 전, 100년 전, 400년 전 이곳에 머물렀던 사람들도 나처럼 추위를 느꼈을까. 이렇게 책은 시작한다.

책은 같은 날씨라도 사람마다 다른 태도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보여준다. 같은 하늘 아래 있지만 개인적인 기억이나 기분으로 날씨를 다르게 경험한다는 것이다. 토머스 하디는 ‘축축한 밤’이라는 시에서 빗속에서 오랜 시간 걷는 것의 고단함을 불평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선조들, ‘지금은 다 죽고 잊힌 나의 아버지들’이 이 정도 비는 사소하게 생각했을 거라며 발걸음을 멈춘다. 옛 선조들은 이런 기후조건에도 날마다 터벅터벅 걸어가 일했을 거라는 걸 떠올리는 것이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황폐한 집’에는 “똑, 똑, 똑” 떨어지는 빗소리가 등장한다. 이 소리는 시계가 째깍째깍 가는 소리를 대신하고 있는 소설적 표현이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존 러스킨은 하늘과 구름에 대한 열정이 넘쳤다. 그는 ‘근대 화가론’이라는 예술 비평서에는 ‘하늘의 열정’ ‘구름의 진실’ ‘구름 무리’ ‘균형잡힌 구름’ 등의 소제목으로 수백 페이지를 가득 채웠다. 자신의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려 차곡차곡 쌓아뒀던 러스킨은 한 강연에서 자신의 드로잉 그림을 가리키며 “구름을 병에 담아 저장해두고 싶다”고 표현했다.

제임스 휘슬러의 ‘날씨 취향’은 다소 독특했다. 그는 밤 안개를 최고로 꼽았다. 누군가에게는 불안하게 느낄 수 있는 밤 안개가 그에게는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었다. 배를 타고 차가운 공기 속에 앉아 주위에서 철썩거리는 어둡고 번들거리는 템스강의 물을 스케치하는 것을 좋아했다.

시대별로 날씨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5세기 중엽의 앵글로색슨 시기의 예술인들은 추위와 얼음을 묘사하는데 몰두한다. 겨울을 표현하는 방식은 정교하고 섬세했지만 따뜻함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었다. 반면 13~14세기 영국 서정시에는 유독 온화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봄과 새의 노래가 갖고 있는 리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자연의 변화와 창조성이 관련있다는 것을 표현했다. 마리 드 프랑스는 봄은 온갖 꽃들이 피면서 사랑이 찾아오는 계절이라고 노래하기도 했다. 저자는 이런 분위기가 당시 기온이 쾌적하게 변한 게 아니라 프랑스어를 쓰는 노르만인들이 영국을 정복한 사실을 영국인들이 근본적으로 부정하면서 미묘한 콤플렉스의 결과로 서정시가 등장했다고 분석한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회화와 문학에서 가을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

책에는 날씨에 대한 이야기가 풍부하게 담겨 있지만 워낙 많은 장르의 영국 문학과 예술을 아우른다는 점도 눈에 띈다. 소설, 희곡, 건축, 시, 일기 등 여러 장르의 문화 영역에서 다뤄진 구름·햇빛·하늘·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책을 읽다보면 영국 사람들, 특히 보통의 사람들보다 더 예민하게 날씨를 받아들였을 예술가들의 날씨에 대한 유별난 관심이 느껴진다.

최미애기자 miaechoi21@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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