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8] 대구의 자부심 국채보상운동<8·끝> 좌절과 희망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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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2-31   |  발행일 2018-12-31 제9면   |  수정 2021-06-22 18:13
일제 방해로 끝내 좌절됐지만, 항일투쟁·금모으기 운동 ‘밑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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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중구 동인동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는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 베델과 주필 양기탁의 국채보상운동 활동 당시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베델과 양기탁은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이후 일제의 탄압에 큰 고초를 겪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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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결국 좌절됐지만 이후 항일투쟁의 밑거름이 됐다.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 마련된 ‘국채보상운동 그후’라는 코너에서는 3·1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나아가 IMF 당시 ‘금모으기 운동’으로 이어진 배경을 살펴볼 수 있다.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제는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일제는 국채보상운동을 무산시키기 위한 방해공작에 나섰다. 통감부와 친일파의 교란 책동은 물론 민족언론과 핵심단체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다. 특히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일제의 국권침탈에 비판적인 논조를 견지하던 대한매일신보는 첫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우선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이었던 베델을 압박했다. 신문사의 주필이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의 검사원이었던 양기탁도 무사할 수 없었다. 일제는 양기탁이 국채보상금으로 들어온 돈 가운데 일부를 횡령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워 구속했다. 이후 양기탁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이 과정에서 국채보상운동은 큰 타격을 입고 동력을 잃고 말았다. 범국민운동으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은 끝내 좌절됐지만, 이후 항일투쟁의 밑거름이 됐고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에는 금 모으기 운동으로 부활해 대한민국의 저력을 다시 한 번 보여줬다. 지난해에는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면서 전 세계인의 문화유산으로 주목받고 있다. ‘대구의 자부심! 유네스코가 인정한 국채보상운동’ 마지막 편은 국채보상운동의 좌절과 희망을 다룬다.

#1. 일제, 방해를 시작하다

국채보상운동이 한반도 전 지역을 휩쓸면서 일제는 신경이 곤두설 대로 곤두섰다. 운동의 궁극적인 목표가 일본 배격이라고 확신한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운동의 불길을 꺼트려야만 했다. 그것도 아주 빠른 시일 내에 말이다. 결국 일제는 궁리 끝에 목표물을 결정하고 총구를 겨냥했다. 바로 국채보상운동의 선두에 서있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였다.

“도대체 그 자는 왜 남의 나라에서 일을 만들고 있나 말이다.”


일제에 지속적인 비판 대한매일신보
국채보상운동 무산 향한 첫 목표물 돼
발행인 베델 ‘치안 방해’ 혐의 근신형
주필 양기탁에 보상금 횡령 혐의 씌워
재판 무죄났지만 신뢰 바닥에 떨어져
베델 스트레스 못이기고 37세에 사망
국권 빼앗긴 후 자금 행방도 묘연해져



일제는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을 향해 불만을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신보의 발행인은 영국인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Ernest Thomas Bethell, 한국이름 배설)이었다. ‘런던데일리뉴스’의 특파원으로 대한제국에 입국해 1905년에 국한문판과 국문판의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코리아데일리뉴스’를 창간한 뒤 연일 반일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었으니 일제로서는 눈엣가시였다. 특히 을사늑약 체결을 기점으로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된 이후로는 항일 비판 수위가 더욱 높아져 있었다. 1907년 1월 두 신문에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는 기사를 게재함으로써 이토 히로부미를 기함시킨 것이 대표적이었다.

“이참에 석탑 건까지 몰아서 잡아버려야 한다.”

석탑 건은 ‘경천사지 10층석탑 밀반출 사건’을 가리켰다. 경천사지 10층석탑은 고려 충목왕 때 경천사에 세워진 13.5m 규모의 탑이었다. 그런데 1907년 2월에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아키가 이 석탑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그것도 군대까지 동원해 140여점으로 조각내서였다. 이를 대한매일신보가 무려 10여 차례의 기사와 논설을 통해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당연히 일제는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고, 이를 계기로 석탑은 1918년 11월에 다시 돌아오게 될 예정이었다.

“펜대만 굴리는 줄 알았더니 아주 점입가경 아닌가. 뿌리를 뽑아야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대한매일신보의 항일 투쟁은 기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런데 국채보상운동 시점부터 변화됐다. 사내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설치하고 의연금을 수합·관리하는 등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선 것이다.

“베델을 꺾으면 신보가 꺾이는 것이고, 신보가 꺾이면 운동도 꺾이는 것이다.”

일제는 베델을 확실하게 손봐줄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2. 아, 베델. 파란 눈의 애국자

“재판이라니.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재판을 받는단 말이오.”

베델은 분노했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처음엔 영국을 향해 베델을 추방해달라고 요구하던 일제가 방향을 틀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엄연한 모국임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베델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동아시아의 이권을 나눠 갖기 위해 1902년 일본과 동맹을 체결한 이후로 밀월관계를 유지하던 때였기에 영국으로서도 시끄럽고 싶지 않았던 탓이었다. 결국 베델은 1907년 10월14일에 서울 정동 주한영국총영사관의 법정에 설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베델은 ‘치안 방해’ 혐의로 6개월의 근신형을 받았다. 하지만 베델은 굴하지 않고 더 강경한 목소리로 일제에 저항했다.

그러던 1908년 3월, ‘스티븐스 저격사건’이 발생했다. 고종의 외교고문을 지낸 미국인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전 세계 언론을 상대로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그때 그가 한 발언이 원인이 되었다. 즉 “조선은 일본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살아가기 어렵다. 일본의 보호국으로 있는 게 여러모로 유익하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전명운(田明雲)·장인환(張仁煥) 열사가 스티븐스 제거에 나섰고, 결국 총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 거사였다. 이 뜨거운 소식은 대한제국에 바로 알려졌지만 기사화되지는 못했다. 친일매체들은 생각 자체가 없었고, 아닌 경우에도 일제의 서슬 퍼런 검열 때문이었다. 하지만 베델은 3월25일 대한매일신보 1면에 이 사건을 머리기사로 실었다. 제목이 심지어 ‘쾌한 자의 쾌한 일’이었다.

열이 오른 일제가 영국을 향해 베델을 좀 어떻게 하라고 닦달했다. 이에 영국은 일본과의 불화를 피하기 위해 베델을 다시 한 번 재판정에 세웠다. 그리고 기존의 ‘치안 방해’ 혐의에 국채보상운동 의연금을 마음대로 썼다는 ‘공금 횡령’을 추가해 6개월 근신을 포함한 3주간의 금고형을 판결했다. 베델은 억울했지만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결국 베델은 중국 상하이에 있는 영국 영사관의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을 이끌던 커다란 날개 하나가 꺾이고 말았다.

#3. 양기탁에 대한 모함

일제는 베델이 상하이에 있는 동안 대한매일신보의 또 다른 축, 주필 양기탁(梁起鐸)을 무너뜨리기로 결정했다. 대단히 치사하기는 해도 당하는 입장에서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즉 도덕성 훼손을 노렸다. 바로 국채보상금 의연금 횡령이었다. 물론 조작이었다.

일제는 베델이 경성으로 돌아오기 전에 실행에 옮기기로 하고 베델이 금고형을 마친 바로 다음 날을 D데이로 잡았다. 7월12일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대한매일신보 사옥으로 평소 양기탁과 안면이 있던 일본인 경찰을 보냈다. 하지만 일본인 경찰은 사옥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신보 사옥이 영국인 치외법권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경찰은 술수를 썼다.

“물어볼 게 있으니 잠시 얼굴만 비춰주시오.”

알고 지내던 이의 심상한 호출에 양기탁은 의심하지 않고 사옥 밖으로 나섰고, 그 즉시로 체포되었다. 일제는 베델이 돌아온 다음 날인 18일 양기탁을 경성지방재판소에 보란 듯이 송치했다. 이때부터 친일어용신문들이 살판난 듯 떠들기 시작했다. 대한매일신보가 횡령은 사실무근이라며 반박했지만 상황은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으로 몰려갔다.

그 상태에서 재판이 시작되었다. 1908년 8월31일 경성지방법원의 첫 공판부터 9월29일의 다섯 번째 공판까지, 허위사실 자백을 강요하는 재판부 측과 당당하게 맞선 피고 측의 열띤 공방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다섯 번째 공판에서 최종판결이 내려졌다.

“피고 양기탁은 무죄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이미 횡령사건을 편파적으로 다룬 기사가 일본은 물론 중국과 동남아에서 발행되던 영자 신문에까지 빠르게 퍼져나갔기 때문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신뢰는 회복 불능이었고, 이는 특히 베델에게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순수한 열정으로 대한제국을 위해 헌신하던 파란 눈의 독립운동가이자 국제적 유명인사였던 베델은 실추된 명예로 인한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하고 1909년 5월1일 결국 숨을 놓고야 말았다. 심장 팽창 증세였다. 그의 나이 고작 서른일곱 살이었다.

#4. 좌절 속에서 피운 희망의 꽃

동력을 잃은 국채보상운동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일제의 계략은 주효했다. 거기에 내부적인 문제까지 선명하게 드러났다. 복잡했던 조직 체계와 의연금 관리의 불투명성 등이 그것이었다. 무엇보다도 1천300만원을 모은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실제로도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고 1년3개월여가 지난 1908년 4월30일 시점에 대한매일신보사 총합소에 모인 의연금이 약 14만3천542원이었고, 이후 7월27일 시점에 일본 헌병대가 집계한 액수는 18만7천842원이었다. 다른 경로를 통해 모인 돈을 더해도 20여만원에 그쳤다. 1천300만원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액수였다. 그래도 거둔 의연금을 공중분해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이를 처리하기 위해 1909년 ‘국채보상금처리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회장 유길준(兪吉濬)을 중심으로 토지재단을 세워 그 수익으로 교육사업을 벌이기로 하고 1910년부터 토지매수에 나섰다. 하지만 국권을 빼앗기면서 무산되고야 말았다. 뿐만 아니라 ‘교육기본금관리회’로 바뀌어 조선총독부의 통제하에 들어가게 된 이후로는 자금의 행방을 그 누구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안타까운 마무리였다.

하지만 국채보상운동은 온 민족으로 하여금 하나가 되는 값진 경험을 주었다. 또한 이를 통해 민족공동체 의식이 보다 강하게 형성되는 데도 힘을 보탰다. 특히 뜨거운 애국심과 민족의식, 독립사상은 1919년 3·1운동과 1920년대 물산장려운동, 그리고 항일투쟁의 밑거름이 됐다.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당시에는 나라의 빚을 갚기 위한 ‘금모으기 운동’으로 이어져 한 번 더 크게 그 빛을 발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국채보상운동 100주년 기념 자료집, 대구시. 세계가 주목하는 국채보상운동, 나눔과 책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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