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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그 중심에 선 대구·경북인 .1]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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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승운기자
  • 2019-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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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는가, 이 하루에 담긴 60일의 외침이…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해다. 3·1운동은 한민족 자주독립운동의 출발점이었고, 항일투쟁의 물줄기를 바꾼 분수령이었다. 나라 안팎에 대한민국의 저력을 보여준 ‘거사’이기도 했다. 3·1운동의 결실이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체계화, 조직화, 활성화를 여는 기폭제가 됐다. 특히 3·1운동의 근간이 된 3·1정신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국민항쟁의 사상적 저수지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3·1정신은 역사의 중심에 서 온 대구·경북의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영남일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대구·경북의 3·1운동 역사와 임시정부 수립의 중심에 섰던 지역민을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강렬하고 격정적인 3·1운동
1919년 3월8일, 대구 서문시장서 먼저 시작
일제 삼엄한 경계 속에서도 90회 이상 지속
지역출신이 주도한 임시정부
국무령 이상룡, 독립운동계 통합 위해 헌신
김동삼은 정부 수립 논의하던 첫 회의 참석

#1. 대구·경북의 3·1운동

3·1운동은 1919년 3월1일 서울에서 시작된 후 3개월여 동안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대구·경북의 3·1운동은 어느 지역보다 장기간에 걸쳐 광범위하게 펼쳐졌다. 3월8일 대구 서문시장을 시작으로 5월7일 청도군 매전면 구촌동 만세운동까지 약 2개월간 80여 곳에서 90회 이상 지속됐다. 가장 먼저 일어난 3월8일 대구 서문시장 만세운동은 일경의 특별경계 속에서도 기독교계 인사들과 학생들이 중심이 돼 ‘대한독립’을 외쳤다. 10일에는 남문 밖 시장에서 두 번째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이후 경북 곳곳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특히 11일 포항, 12일 구미·의성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면서 확산 조짐을 보였다. 16일을 기점으로 27일까지는 절정에 달했다. 의성, 안동, 봉화, 영덕, 청도, 영주, 포항, 상주, 김천, 영양, 청송 등지에서 만세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4월에 들어서도 만세함성은 숙지지 않았고 5월7일 청도 매전면 구촌동까지 이어졌다.

특히 대구·경북의 만세운동은 강렬하고 격정적이었다. 일제 관헌에 붙잡힌 인물이 무려 2천133명에 달했다. 체포된 인물이 많다는 것은 대구·경북의 강한 투쟁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2. 임시정부 중심에 선 대구·경북민

3·1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탄생시키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전국적인 거사 이후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됐다. 기실 3·1운동 과정에서 총괄조직과 구심점이 부족했던 것은 무엇보다 아쉬었다. 이 때문에 3·1운동은 지역과 계층에 따라 투쟁의 형태와 강도가 달랐고 분산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향후 전반적인 항일투쟁을 조직적으로 이끌기 위한 구심체가 필요했다. 이른바 임시정부 수립이 그것이었다. 논의 끝에 1919년 4월11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구성하고 각 도 대의원 30명이 모여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했다. 곧바로 4월13일 한성임시정부와 통합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해 선포했다.

3·1운동과 마찬가지로 임시정부 역사에도 대구·경북인의 역할은 두드러졌다. 대구 출신의 백남규·현정건을 비롯해 안동 출신의 이상룡·김동삼·김응섭, 고령 출신의 남형우, 성주 출신의 김창숙, 구미 선산 출신의 김정묵, 칠곡 출신의 장건상, 경주 출신의 손진형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이상룡은 1926년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으로 선출돼 여러 분파로 나뉜 독립운동계의 통합을 위해 헌신했다. 김동삼 역시 정부 수립을 논의하던 첫 회의에 참석한 주요 인물이었고, 남형우는 법무총장에 이어 교통총장을 맡았다. 장건상은 외무차장을 지냈다.

#3. 3·1정신과 대구·경북 정신

대구·경북민이 3·1운동과 임시정부 역사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체화된 정신적 동력에서 비롯된다. 무엇보다 국난의 시기에 발현되는 대구·경북 특유의 정신과 기질, 역동성이 결집되었기 때문이다. 대구·경북은 예부터 국난의 시기에 스스로 일어나 역사의 중심에 서왔다. 그것은 강한 신념에서 피어난 ‘의(義)’의 길이었고 ‘충(忠)’의 길이었다. 절망의 시대를 뛰어넘는 혁명의 길이기도 했다. 그 역사는 3·1운동 이전과 이후에도 쉼 없이 이어지며 큰 물길을 이루었다. 때로는 의병항쟁으로 일제에 맞섰고, 때로는 애국계몽운동으로 민족의 역량을 축적해 나갔다. 3·1운동 때는 들불처럼 일어나 저항의 깃발을 들었고, 무력으로 맞선 의열투쟁에서는 목숨을 걸고 광복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는 자주, 자유, 단결, 평화의 가치를 지향한 3·1정신과 맥을 같이한다. 이러한 정신은 시대와 공간의 경계를 넘어 한민족 전체가 공유해야 할 정신적 유산이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그날의 역사와 정신을 되새기는 이유다.

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참고=대구독립운동사·경북독립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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