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그림편지] 안은지 작 ‘Rotes Meer’

  •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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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1-11   |  발행일 2019-01-11 제40면   |  수정 2019-03-20
붓보다 소중히 놓인 청소 도구…의도하지 않은 번짐, 긁힘, 빗겨짐 ‘지치지 않는 패기·무한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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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수성구 범어아트스트리트에 있는 안은지 작가의 작업실은 아담했습니다. 큰 방 한 칸 정도 되는 그곳에는 그가 작가로서 걸어온 길을 한눈에 보여주는 작품들이 빽빽이 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작업실 한편에 다양한 청소용품들이 있어 시선을 머물게 합니다. 화가의 작업실에는 잘 어울리는 않는 듯한 다양한 크기의 빗자루와 밀대, 쓰레받기 등이 꽤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지요. 이에 비해 그림을 그리는데 필요한 붓은 구석 자리에 있는 조그만 통에 담겨져 있어 낯선 이의 시선이 머물 겨를을 별로 주지 않았습니다.

작가도 기자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친절히 설명합니다. “저 청소도구들은 그림에 필요한 것입니다. 제 작업은 붓보다 이렇게 큰 청소용품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의 설명을 듣고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의 말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안 작가는 수채화 물감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는 번짐, 흐름에 천착하고 있습니다. 이는 물감과 물이 주는 우연성에 매료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독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2004~2011년 독일에서 생활하면서 뉘른베르크국립조형예술대학 회화과를 나왔지요.

“그때 교수님이 너만의 것, 한국적인 것을 찾으라고 조언해주었습니다. 수채화물감, 먹, 잉크 등을 활용해 나만의 작업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수채화물감, 먹 등을 종이에 떨어뜨리면 스며들면서 퍼져나가고 때로는 흘러내리는 것을 경험했는데 그 느낌이 좋았습니다.”

번짐, 흐름 등은 의도되지 않은 것이라 좋았다고 했습니다. “우연하고도 자연발생적인 작업과정에서 자연현상들을 닮은 무언가 유기적이고 근본적인 요소들이 탄생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나 우주와도 같은 곳에서 발견되는 비정형적인 형상 같았습니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작업을 시작하지만 이런 재료를 사용하면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는 우연적 효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자신이 컨트롤할 수 없는데서 오는 것, 상상 그 이상의 것이 탄생되어 나오는데 그것에 매력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독일에서는 작업실이 작아서 대작을 할 수 없었는데 귀국 후 전국의 여러 레지던시를 돌아다니며 대작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어 그는 이 작업에 더욱 빠져들게 되었답니다. 특히 창원 부곡스파디움 레지던시를 할 때 옥상에서 물탱크에 호스를 연결해 아크릴물감을 섞어서 다양한 물작업을 해본 것이 기억에 남는다는 말도 곁들입니다. 그의 작업실을 보니 수채화물감, 먹 등으로 그린 구상·반추상 작품들도 벽에 걸려 있습니다. 안 작가는 구상화에서 반추상화를 넘어 2016년부터는 추상화 쪽으로 완전히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형체를 없애고 번짐, 흐름에 집중한 때문입니다.

최근작을 훑어보니 물감이 흘러내리고 번지는 것만이 아니라 무언가에 긁히거나 빗겨진 것 같은 다양한 흔적들이 자리합니다. 그의 작업실에 소중히 모셔져 있던 청소도구들은 이런 표현을 할 때 요긴한 재료입니다. 물감을 캔버스에 칠한 뒤 빗자루, 밀대, 쓰레받기 등으로 새로운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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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을 보다보면 유독 많이 마주하는 색상이 있습니다. 파랑입니다. 그는 자신의 파랑을 ‘민트그린’ ‘아쿠아그린’이라고 말합니다. 순수한 파랑이 아닌 파스텔톤의 녹색이 도는 파랑입니다. 작업을 할 때 물을 즐겨 다루는 그가 파랑을 좋아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할 수 있습니다. 파랑은 바다의 색, 즉 물의 색이기 때문입니다. 파랑이 왠지 부담이 없고 시원해서 좋다는 그를 보니 말투에서부터 시원한 성격이 느껴지는 작가의 모습과 참 닮은 색상이란 생각이 스칩니다.

파랑에 비해 빨강은 대하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그의 작업실에 외롭게 걸려 있는 빨강 톤의 그림 하나에 시선이 갑니다. “파랑으로 작업하다가 매너리즘에 빠지면 가끔 빨강으로 돌아갑니다. 대하기 힘들지만 그것이 또 다른 자극을 줍니다. 표현기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추상을 하다가 지치면 가끔 구상도 합니다. 이런 과정이 제 나름의 담금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작아보였던 그의 작업실이 점점 커져보였습니다. 어떤 이야기도 그려지지 않은 그의 작품 속에서 지치지 않는 패기와 무한한 가능성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의도되고 정해진 것보다는 그 너머의 미지에 매력을 느끼는 그의 모습에서 모험가의 꿈을 보는 듯합니다. 그에게는 전진만이 있을 뿐입니다.

김수영 주말섹션부장 sykim@yeongnam.com

#안은지 화가는 영남대 서양화과 및 형성디자인과, 독일 뉘른베르크국립조형예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했다. 독일 유학시절 바이에른주 신진작가 12인에 선정됐다. 2011년부터 10여 차례 개인전을 열었으며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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