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여자아이들은 영원히 어리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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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1-17   |  발행일 2019-01-17 제30면   |  수정 2019-01-17
체육계서도 확산되는 미투
권력형 성범죄 엄중한 처벌
피해자 보호시스템도 필요
더이상 어린 여자선수 아닌
강력한 여성이 돼 ‘큰 울림’
[여성칼럼] 여자아이들은 영원히 어리지 않다
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

‘조재범 성폭행 의혹 사건’으로 촉발된 체육계에 ‘미투’가 확산되고 있다. 쇼트트랙, 유도에 이어 태권도까지 피해자들이 자신의 얼굴과 실명을 드러내며 지도자나 코치에게 당했던 피해사실을 밝히고 나선 것이다. 금메달을 2번이나 땄던 빙상 국가대표 선수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자신을 가르쳤던 코치로부터 상습적인 폭행과 성폭행을 당해왔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그것도 미성년자일 때부터 말이다.

금메달을 딴 유명 스타 선수의 고발이어서 사회적 파장이 더 큰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금메달을 따고 안 따고의 문제가 아니라 태극마크를 단 국가대표까지 그런 일을 당했다면 비인기 종목의 힘없고 형편 어려운 선수들은 얼마나 많이 이런 끔찍한 일을 당했을지 짐작조차 어렵다. 국민적 공분이 이는 게 당연하다.

미투 운동의 핵심은 권력을 이용한 구조적 범죄라는 것이다. 이런 사건이 알려질 때마다 가해자 측에서 하나같이 내세우는 말이 있다. ‘연인관계였다’ ‘사랑하는 사이였다’. 이는 처벌의 정도를 가볍게 하려고 내미는 비겁하고도 야비한 변명이자 하루하루를 죽음과 같은 고통 속에서 견뎌오고 있는 피해자들을 말 그대로 여러 번 죽이는 일이다. 미투 사건이 터질 때마다 ‘구조의 문제’임을 지적하는 이유는 이것이 결코 개인의 일탈이나 연인 간의 다툼문제가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이번 체육계의 미투 사건처럼 가해자들은 피해자의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자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 선수들을 침묵하게 한 가장 큰 위협이 “운동 그만두고 싶냐”라는 말인 것이다. 인생을 걸고 힘든 훈련을 반복하며 기술을 연마해온 이들에게 운동을 그만두는 일은 목숨을 버리는 일과 맞먹을 만한 무게이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이 이처럼 침묵하고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것은 절대 바뀌지 않을 것 같은 견고한 침묵의 카르텔 구조 때문이기도 하다. 말할 수도 없고, 말해서도 안 되고, 말해도 소용없는, 옴짝달싹 못할 만큼 사방이 꽉 막힌 견고한 카르텔은 피해자에게 침묵과 복종을, 가해자에겐 그렇게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더라는 암묵적이고 폭력적 관행을 가져다준다.

성폭력 피해자가 사건의 트라우마를 해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해자에 대한 철저한 응징이라고 한다. 피해자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없었던 일로 숨기거나 쉬쉬하는 것으로는 절대 그 고통을 끊어낼 수 없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언제까지 사회여론이 들끓고 나서야 장관이 나서서 사과하고, 대통령이 철저한 조사와 엄중한 처벌을 지시해야 비로소 사건이 신속히 진행되며 후속 대책이 마련되는지에 대해 심각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모든 일을 국가가 해결해주고, 여론이 보호해주기는 어렵다. 피해자가 유명인이 아니어도, 굳이 실명과 얼굴을 드러내지 않더라도,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피해자들이 침묵의 카르텔을 깨고 당당하게 용기를 낼 수 있어야 하고, 가해자에겐 그것이 중대한 범죄임을 깨닫게 해야 한다. 권력형 성범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엄중한 처벌과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시스템도 확실히 마련되어야 한다.

체육계 여성선수들이 잇따라 미투에 나선 것은 제2, 제3의 피해자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들은 더 이상 어린 피해자가 아니다. 당당하고 강력한 여성으로 성장해 세상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용기 있는 고발이 큰 울림이 되어 세상을 바꾸는 신호탄이 되고 있는 것이다. 권력을 이용해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에게 이 말을 들려주고 싶다. 미국 체조대표팀 주치의로 있으면서 30년 동안 150명이 넘는 여자선수에게 성폭력을 가했던 래리 나사르를 향해 법정에서 피해자가 한 말이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영원히 어리지 않다. 강력한 여성으로 변해 당신의 세계를 박살내러 돌아온다.”
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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