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일 칼럼] 중국에 대한 횡설수설

  • 박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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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1-23   |  발행일 2019-01-23 제31면   |  수정 2019-01-23
[박재일 칼럼] 중국에 대한 횡설수설

오래전 미국을 처음 마주했을 때 나는 실망했다. 이른 아침 미국의 첫 풍경, 샌프란시스코 시청으로 가는 길은 난장판이었다. 이슬을 맞고 한밤을 지낸 노숙자들이 일제히 기지개를 켰다. 홈리스(노숙자)란 말을 그때 알았다. 주사기도 뒹굴었다. 아! 초강대국 미국에 무슨 이런 꼴이…. 그런데 이게 미국은 아니었다. 홈리스와 게이의 천국이 샌프란시스코이고, 그건 대륙에 퍼진 자유정신의 일부란 것을 나중에 알았다. 뉴욕테러의 후유증이 사회적 긴장감을 극도화하지만, 반세기 뒤에나 올 것이라던 흑인 대통령까지 탄생시킨 그들은 한국을 일본처럼 존중하지는 않아도 노골적으로 무시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오바마는 한국의 교육시스템과 건강보험에 찬사를 보냈지 않았던가. ‘팍스 아메리카나’가 그냥 나온 것은 아니다.

미국 절반에 가까운 국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며 세계 2강으로 떠오른 중국도 가보면 역시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만리장성, 자금성의 베이징에다 상하이, 선전으로 이어지는 대도시는 미세먼지에도 불구하고 경제대국 중국을 목격하게 한다. 얼마 전에는 미국도 가보지 못한 달의 뒷면에 우주 탐사선을 보냈다. 마침내 그들은 현대판 비단길인 ‘일대일로’를 외치며, 세계의 패자 ‘팍스 시니카’의 야심을 드러낸다.

G2로 불리는 두 강대국은 현재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다. 근 1년간 트럼프와 시진핑은 관세폭탄을 주고받고 있다. 둘 다 벼랑끝으로 떨어질 수는 없기에 조만간 타협을 볼 모양이지만, 이 바람에 세계경제, 특히 둘 사이에 낀 한국은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중국은 큰 나라였다. 중국 ‘때놈’이란 게 작은 일본인 ‘왜놈’과 대비되는 ‘큰 사람-大놈’에서 나왔다고 할 정도로 우리는 수천년간 중국 언저리에서 오랑캐 취급을 받았다. 이달초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시진핑 주석과 정상회담을 했다. 중국 언론은 특이한 장면을 집중 내보냈다. 김 위원장이 시진핑의 말을 받아적는 모습이다. 김정은의 할아버지인 김일성 주석 시절, 구 소련(러시아)과 등거리 외교를 하며 거의 동급으로 중국과 맞섰다는 조선사회주의인민공화국을 상기하면 열패감이 크다.

전문가들은 중국은 지금 경제적으로 성공하면서 자부심을 넘어 점차 교만해지고 있다고 한다. 미·중 무역전쟁의 불똥으로 자신의 딸이 캐나다에서 최근 구속됐다 풀려난 중국 화웨이 그룹, 런정페이 회장이 “서양인(미국)들은 신을 믿지만 석탄으로 움직이는 기차를 발명했듯이, 공산당원이라고 비즈니스를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응수한 것은 자부심이다. 반면 시진핑이 트럼프를 만나 “사실 한국을 포함한 한반도는 수천년 동안 중국의 일부였다”고 한 것은 자부심을 넘었다. 사드 배치에 인민이 총궐기하듯 들고 일어나고, 불도저로 롯데 상가로 진격하는 중국은 분명 교만이다. 이는 한국 서울의 미대사관 앞에서 줄기차게 반미 시위를 해도, 인천에서 맥아더 동상에 불을 질러도 미국인들이 삼성이나 LG의 텔레비전과 세탁기 불매운동을 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과 대비된다. 후일 전모가 드러나겠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혼자 밥을 먹어야 했던 외교적 푸대접도 교만의 연장선일 게다. 교만은 일상에서도 목격된다. 한국에 온 중국 유학생들은 한국말 배우기를 무시한다. 스포츠에서도 중국은 유독 한국에 격하게 반응한다. 물론 중국인의 행동은 ‘국가와 개인을 동일시’하는 전체주의 체제의 산물이란 점을 알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이제는 다 아는 역사가 됐지만 한국이 ‘먹고 사는 삶의 질 차원’에서 중국에 우위를 점한 건 어쩌면 신라 이래 근 2천년 역사에서 근대 수십년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삼성과 LG, 현대차가 중국에 조 단위 공장을 만들고 있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중국이 한국에 그랬다는 말은 못 들었지 않은가. 중국의 자부심과 교만은 우리에게 경쟁을 넘어 은근한 위협으로 다가온다. 이는 반미(反美)는 세련된 지성이고, 반중(反中)은 용인할 수 없다는 일부 정치적 기류와 중첩된다. 한때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신비적 중국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사실 나는 작금의 한-중 나아가 한반도-중국의 역학관계가 역대 조선-중국의 관계로 되돌아갈까 두렵다.

박재일기자 park11@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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